독일 외교관 눈에 비친 19세기 동북아


격동의 동아시아를 걷다/막스 폰 브란트 지음ㆍ김종수 옮김
살림 발행·448쪽·2만3,000원

서양 외교관이 본 ‘조선-淸-日’…‘격동의 동아시아를 걷다’



◇ 격동의 동아시아를 걷다/막스 폰 브란트 지음·김종수 옮김/448쪽·2만3000원·살림


‘일본이 조선에 대해 야욕을 품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급기야 16세기 말에는 거대한 원정대가 조선으로 출정하기에 이르렀다. 왜군은 조선에서 끔찍한 난동을 부렸으며 승리의 징표로 조선 병사들의 귀와 코를 잘라내 교토로 보냈다.’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배운 많은 것 가운데 언론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는 것을 제일로 꼽을 수 있다. 일반 국민이 전쟁터의 소식을 접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전쟁에서 거둔 전과가 수많은 희생을 치른 대가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은폐된다.’

저자는 1872년부터 일본 주재 독일 공사, 1875년부터는 청나라 주재 공사를 지냈다. 조선과 독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에도 관여하는 등 독일의 동아시아 외교정책 실행에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책에서 19세기 말 조선, 중국, 일본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경쟁과 동아시아 각국의 내부 문제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조선에 대한 서술은 총 15장 가운데 3장과 8장 등 2개에 그친다. 일본에 대한 기술의 연장선에서 조선 문제를 바라보는 형식이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저자는 일본의 침략 본능에 주목했다. 임진왜란과 명성황후 시해를 주요한 사건으로 다뤘고, 특히 명성황후 시해를 위한 일본의 치밀한 준비와 실행 과정을 꼼꼼히 살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촉발된 일본의 만행에 대한 조선인들의 뿌리 깊은 원한이 명성황후 시해로 치유하기 힘든 트라우마가 됐다”고 해석했다.

‘독일 외교관의 눈에 비친 19세기 조선, 중국, 일본’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본이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 청나라의 화폐제도 개혁 등 당시 동아시아의 핫이슈를 폭넓게 다뤘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서구인 시선으로 본 ‘정치적 미아’ 조선


격동의 동아시아를 걷다
막스 폰 브란트 지음, 김종수 옮김
살림, 448쪽, 2만3000원

	청일전쟁(1894년) 개전 소식을 듣고 술렁거리는 서울 거리의 외국인들 모습. 당시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1894년 8월 13일자)에 실린 삽화다. [중앙포토]

한국문화번역원이 기획한 ‘그들이 본 우리 총서(Korean Heritage Books)’ 시리즈 네 번째 책이 나왔다. 근대 한국의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한 서구인의 기록을 번역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100여 년 전 타자의 시선에 봉인된 우리의 과거를 다시 펼쳐 보는 일은 두렵다. 구한말 ‘근대 한국’은 우리에겐 이미 낡은 과거로 지나갔지만 서구의 입장에선 아직도 현재형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과 20~30년 전까지 한국을 ‘6·25전쟁’으로나 인지했던 서구의 시각은 그 3년간의 비극적 전쟁만으로 굳어진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한국은 그보다 한 세기 전인 구한말부터 청나라와 일본, 서구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낀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아였다. 어차피 열강들의 전쟁터였던 한반도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이 터지는 것이 그들에겐 별로 놀랍지 않은 이야기였을 수 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됐다고 그 오래된 역사적 기억의 잔영이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 막스 폰 브란트(1835~1920)는 19세기 동아시아에서 40년 가까이 활약한 독일의 외교관이다. 한국 역사에는 1882년 조·독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독일 측 전권대사로 등장한다(이 조약은 비준이 안 돼 이듬해 새로 맺어졌다). 당시 청나라 주재 공사 신분이었던 그가 타고 온 독일 군함은 인천 월미도에 정박했다. 부관인 김홍집(1842~1896)을 대동한 조영하(1845~1884)와 직접 조약을 맺었다.

주로 청나라에서 활동했고 한국에는 세 차례 정도 방문했을 뿐이지만 19세기 독일 외교관 브란트가 바라본 조선의 모습은 냉정하고 정확하다. 총 15장으로 구성된 책 중에 조선 문제를 다룬 것은 2개 장이지만 동아시아 정세와 역사를 설명하는 곳곳에 볼품 없는 약소국 조선의 상황이 언급되고 있다.

조선에 대한 장에서 그는 임진왜란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이 두 가지 사건을 함께 묶은 이유는 일본에 대한 조선의 증오심이 얼마나 뿌리 깊은 역사적 연원을 지녔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놓고 저자는 “일본은 겉으로는 유럽문화를 발전시킨다고 하면서도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에게 유럽문화의 전달자 역할을 하기엔 얼마나 부적합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122쪽)고 평가한다.

30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을 비교하는 관점도 흥미롭다. “두 경우 모두 결정권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에 있었다. 만약 1592년에 조선 함대가 그러했듯이 1894년에 청나라 함대가 일본군 함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일본이 일으킨 도발의 결말은 이번에도 300년 전과 같았을 것이다”(100쪽).

청나라에서 외교활동을 해서 그런지 중국의 입장에서 일본을 불신한다는 인상이 배어나온다. “중국 문명의 지류에 불과한 일본의 문명은 정신적 분야에서 고유한 꽃을 피우지 못했다”(79쪽) 등의 표현이 그렇다. 청일전쟁 뒤 일본의 행태에 대해선 “전승국에 예속당한 어떤 민족도 조선인과 조선의 정부만큼 오만불손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295쪽)며 조선에 동정적 시선을 보낸다.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학자로서, 또 19세기 말 격동의 한·중·일 정세를 겪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저널리스트로서, 그렇지만 서구 제국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외교관으로서 저자가 남긴 100년 전 근대 한국의 기록. 마음이 편하지는 않겠지만 이 역시 21세기 한국이 새겨 들어야 할 오래된 ‘타자의 시선’이다.

배노필 기자
2008.08.16 00:14 입력 / 2008.08.16 02:18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