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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조실록 2 (살림지식총서 517)
이희진 지음 | 2017년 8월 25일
브랜드 : 살림지식총서
쪽수 : 200 쪽
가격 : 4,800
책크기 : 120*190
ISBN : 978-89-522-3712-5-0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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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 517.hwp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통일신라의 꽃을 피워낸
신라 1000년의 역사가 펼쳐진다!
문고본 최초로 시도되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 그 일곱 번째!
『신라왕조실록』1․2․3권 출간!

살림출판사에서는 지난 14년간 문・사・철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과, 과학기술・예술・실용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살림지식총서≫를 500종 이상 출간했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문고’임을 자처하는 ≪살림지식총서≫가 이번에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전 19권)’를 준비했다. 문고본으로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기획이다.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는 고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까지 반만 년을 지속한 한국사의 맥을 왕대별로 묶었다. 여기에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서고 고조선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는 요하문명도 포함시켰다. 이는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중국에 대항할 역사관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전 6권)을 2015년에 첫 번째로 선보였고, 2016년에는 고대사 편인 『고구려왕조실록』(전 2권) 『백제왕조실록』(전 2권) 『고조선왕조실록』 『가야왕조실록』 『발해왕조실록』 등이 출간되었다. 이어서 2017년에 이 책 『신라왕조실록』(전 3권)을 일곱 번째로 펴낸다.

박․석․김 세 왕족 혈통이 면면히 빚어온 신라 1000년을 펼치다!
신라는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1000년의 왕조다. 그러다 보니 다른 왕조에 비해 감안해야 할 변수도 많다. 우선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신라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며 황당한 근거를 드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왕족을 비롯한 신라 요인들의 계보와 활동 연대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이유를 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 사회는 이른바 ‘골품(骨品)’에 따라 신분을 정했고, 높은 신분을 유지하려면 불가피하게 극단적인 근친혼을 해야 했다. 이러한 극단적 계보 혼란은 활동 연대 착오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신라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저자는 피력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부정할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초기 기록은 일단 반영하여 서술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왜곡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정세 변화에 따른 고구려․백제․가야․왜와의 유기적 관계망을 중심으로 신라 1000년 사직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았다.

끊임없는 왜의 침입에도 굴하지 않은 신라의 방어력과 외교술!
한국 고대사의 관심사 중 하나로 현재 일본열도 세력의 조상인 왜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왜는 백제보다 신라와 가야가 먼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야는 결국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왜와 관계가 밀접했던 신라 초기 역사가 이른바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라와 관계된 왜의 역사를 해석할 때는 다른 나라보다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고구려・백제・가야 경우도 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경우 이들 나라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많다. 『일본서기』에서는 연표조작까지 해가며 진구황후[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어떻게 복속시켰는지 제법 구체적으로 허황한 내용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심지어 왜가 백제․고구려까지 복속시켜 이른바 삼국에 내관가를 따로 두었다고까지 기록해놓았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가 왜의 끊임없는 노략질과 침략에 얼마나 당차게 맞서고,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어떻게 맞대응해 나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저자는 신라․고구려․백제․가야 등이 왜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한 사료를 조명해 그 모순점을 바탕으로 사실 관계를 규명하여, 『일본서기』가 얼마나 우리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밝혀준다.


혁거세거서간의 신라 건국에서 문무왕의 삼국통일 완결까지!
저자는 『일본서기』의 왜곡 부분을 대조해 사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함께, 신라 역사를 왕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서술해 나라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썼다. 『신라왕조실록 1』에서는 신라건국 기원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514년(지증마립간 15)까지로 이웃 나라와 크고 작은 전쟁이나 외교적 마찰이 있긴 하지만,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려는 통치자의 노력들이 보인다. 그리고 『신라왕조실록 2』는 본격적으로 삼국통일 전쟁이 발발한 때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부분으로 당시의 전투 상황을 실감 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펼쳐놓았다. 또한, 그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장수들의 활약상을 『삼국사기』 「열전」에서 발췌한 무용담과 함께 실어 그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룬 후, 당나라와 이권다툼으로 옥신각신하던 중에 당나라 행군총관 설인귀와 문무왕이 주고받은 서신은 나당전쟁 와중의 꽃이라 불릴 만큼 명문장 중의 명문장이다.

경순왕 신라 1000년의 사직을 놓치다!
『신라왕조실록 3』에서는 삼국통일 이후부터 멸망까지 다룬다. 삼국통일 직후 왕들은 통일신라로서의 체제를 재정비하며 나라가 평화롭게 잘 운영되도록 힘썼다. 그렇지만 765년 이후, 혜공왕 대에 이르러 거듭된 반란으로 결국 왕과 왕비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 왕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불안한 정국이 150년간 계속 이어지고, 비정상적 왕위 찬탈 등 끊임없는 혼란이 빚어진다. 후백제․후고구려가 부흥한 900년대에 들어서는 신라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고, 그에 따라 세력도 약화되었다. 결국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삼국을 통합한 고려 태조 왕건에게 신라 1000년의 사직을 내놓았다. 신라는 이로써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라왕조실록 3』 부록 신라연표
기원전 57년(혁거세거서간 1) 신라 건국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고려에 넘어갈 때까지 총 56대 왕에 걸친 신라 1000년의 연표가 한눈에 펼쳐진다.
제23대 법흥왕
제24대 진흥왕
제25대 진지왕
제26대 진평왕
제27대 선덕여왕
제28대 진덕여왕
제29대 태종무열왕
제30대 문무왕
어쨌든 신라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도입했던 시기가 법흥왕 때였음은 분명하다. 이때 왕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이런저런 불평을 많이 하여 난처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 또는 처도處道)이 제안을 하나 했다. 자신의 목을 베어 반대 여론을 꺾어버리라는 것이다. 법흥왕은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면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며 반대했으나, “도를 이룰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이차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렇게 이차돈과 시나리오를 짜놓은 법흥왕은 신하들을 불러 불교 도입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물론 신하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괴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 정상적인 도(道)가 아니다. 이를 방치하면 후회할 것이다.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그러자 이차돈이 나섰다. “이는 잘못된 논리다.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교가 심오하여 도를 이룰 수 있다 하니, 믿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법흥왕은 미리 짜놓은 대로 이차돈을 나무랐다. “여론이 기울었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어쩔 수 없다”며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했던 것이다. 이차돈은 처형당하기 전, 예언 하나를 남겼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에게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의 목을 베자, 과연 목이 잘린 곳에서 우윳빛처럼 하얀 피가 솟구쳤다. _14~15쪽

550년(진흥왕 11) 정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진흥왕은 거듭되는 공방전에 양쪽이 지친 틈을 이용해, 이찬 이사부가 지휘하는 병력을 통해 이 두 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이 성들을 보강하고 군사 1,000명을 방어 병력으로 배치했다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좀 의문이 있다. 바로 다음 해 신라는 백제와 협력하여 한강 지역을 빼앗는 연합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백제가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성을 신라에 빼앗겼다면 1년도 안되어 고구려를 협공하는 연합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나 배경에 왜곡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_22~23쪽

당나라 군대와 따로 출발한 신라군은 7월 9일, 황산(黃山) 벌판까지 진군했다. 이때 백제 장군 계백(堦伯)의 부대가 먼저 험한 곳 세 군데에 진영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을 지휘관으로 하는 신라군은 네 번이나 세 군데 요충지를 돌파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다.
이 상황에서 신라군은 사기를 올리기 위해 즐겨 쓰는 수법을 사용했다. 먼저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을 적진으로 돌격시켜 전사하게 했고, 뒤이어 좌장군 품일도 아들 관장(官狀: 또는 관창官昌)을 내몰았다. 관장이 처음에는 생포되었다가, 계백이 돌려보내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가 싸우다 전사했다. 이렇게 해서 사기를 회복시킨 신라군이 백제군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백은 전사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_116쪽

7월 16일에 한성에 도착한 문무왕은, 여러 총관들에게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이후의 작전에 참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김문영 등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격파했고, 9월 21일에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을 보내 이적에게 항복을 청했다. 항복을 받은 이적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영공을 따라 당으로 가며,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도 이들을 수행했다.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향하다가 힐차양(肹次壤)에 이르러 고구려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 문무왕은, 당나라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보고를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_167

2월 21일, 문무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교서를 내렸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고생하던 신라를 위해 선왕(김춘추)께서는 바다를 건너 중국에 군사를 청하셨다. 백제는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멸망시키지 못하고 돌아가신 선왕의 유업(遺業)을 과인이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이 편안해졌다. 전쟁터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상을 주었고, 싸우다 죽은 혼령들에게는 명복 빌 재물을 주었지만, 옥에 갇혀있는 죄인은 불쌍히 여겨 울어주던 은혜[읍고泣辜]를 받지 못한 고로 사면령을 내린다. 총장(總章) 2년, 669년 2월 21일 새벽 이전에 5역(五逆)의 죄를 범하여 사형을 받은 죄목 이외에는 모두 석방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_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