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년 전 구한말 시대로 문화답사여행을 떠나자. 여행의 안내서는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１８３１∼１９０４년）이 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도서출판 살림）. １８９４년초 한국 땅을 처음 밟은 비숍은 １８９７년까지 모두네 차례 １１개월에 걸쳐 거룻배와 조랑말을 타고 때로는 걸어서 전국 곳곳을 찾아다녔다.

○１８９４년 이후 ４차례 방한
"나는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시여 침을 뱉아라"고 절규한 김수영 시인이 １９６４년에 발표한 시 〈거대한 뿌리〉의 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구한말 우리 문화를 애정어린 눈길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는 첫 번째 방문에서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열강들의 면전에서 예법과 관습과 중세적인 군주국의 수도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안타깝게 몸부림치는' 서울의 첫 인상을 간직한 채 한강 상류로 나룻배를 타고 현지답사에 나선다. "농부들은 식사 후에 뜨거운 숭늉을 마시며, 꿀물은 사치품으로 생각하고, 잔치 같은 경우에는 귤껍질이나 생강에서 우려낸 액체를 마신다. 귤껍질을 말리는 것은 한국 주부들의 큰 일 중의 하나이다. 모든 초가집 지붕에는 말린 귤껍질들이 고드름처럼 달려 있다. "

１３일 동안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단양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강 양안에 옹기종기 살고 있는 농민들의 의식주와 양반들의 '기생충'과 같은 생활을 현미경을 들이대고 본 듯 세밀하게 관찰했다. 단양에서 거센 급류로 뱃머리를 돌려 남한강과 북한강의 분기점까지 내려온 뒤 북한강 상류 춘천까지 올라갔다가 나룻배를 버리고 조랑말을 타고 육로로 금강산 답사길을 떠난다.

○금강산 절경에 탄복
단발령에 오른 그는 금강산의 절경에 탄복한 나머지 "아,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진정 약속의 땅인저, 진정코"라고 읊었다. 금강산의 장안사 유점사 등 사찰들을 두루 둘러보고 원산으로 가는 길에 중대리에서 하룻밤 쉬면서 정리한 한국인의 식생활에 대한 묘사는 날카롭기까지 하다. "한국인들은 무엇이든 먹는다. 참새구이는 머리와 발톱, 내장까지 '살찐 송아지 고기'와 마찬가지로 통째로 요리한다. 나는 낚시 바늘에서 작은 생선을 떼어내는 사내들을 여럿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고추장을 버무려놓은 그릇에 넣어 뼈째로 먹었다."

그는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６개월간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답사하고 １８９５년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그곳에 이주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훨씬 성공한 모습을 목격한 그는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기도 한다. 그의 한국 농민계층에 대한 애정이 "한국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변한 것이다.

고종 황제가 신뢰한 외국인들 가운데 한사람인 그는 １８９５년１월 고종과 명성황후（민비） 내외를 처음 알현하는 등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고종을 만나기도 했다. 그가 을미사변으로 입은 충격은 명성황후에 대한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자가 매개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 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그러했다"는 평가에 잘 나타나 있다 .

○명성황후 우아함에 감명
그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１１월 경기도 고양 파주를 거쳐 개성봉산 황주 등 황해도 일대와 평양 자산 덕천 안주 순천 등 평안도 일대를 답사하고 다음해 １０월 서울을 마지막으로 방문해 １８９７년 １월 영국으로 돌아갔다. ５백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그의 한국답사기는 요리 양념빨래 결혼 장례식 등 일상생활과 정치상황은 물론 민요 등 우리 가락, 상품의 품질과 가격, 귀신들의 내력, 기생과 무당의 춤, 객주 운영실태 등 당시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한 '백과사전'식 기록이다.

３년 반에 걸쳐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소설가 이인화씨는 "이 책은 사람들이 영어를 몰라서 번역하지 못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한국을 몰라서 번역하지 못한 것"이라고 역자 후기에서 밝히고 있을 정도다.
---한겨레신문 안영진 기자 ( 1994-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