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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삼국유사, 이 땅의 기억
이주향 지음 | 정선자 삽화 | 2018년 11월 15일
브랜드 : 살림인문
쪽수 : 228 쪽
가격 : 15,000
책크기 : 국판
ISBN : 978-89-522-3996-9-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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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철학자 이주향, 신화적 시각으로 부드럽게 '삼국유사'를 조명하다!
『삼국유사』, 일연 스님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고 존중할 줄 아는
부드러운 손으로 써내려가다!

어느 날 『삼국유사』가 내게로 왔습니다. 곰이 사람이 된 이야기, 아기를 넣고 끓인 쇳물
로 종을 만든 이야기, 만 가지 시름을 쉬게 하는 피리 이야기 등 황당한 이야기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 여기고 바람에 날려버린 이야기들이 어느 날 바람을 타고 내게로 와
내 스승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소크라테스
의 등에 같은 스승!
평범한 우리 눈에도 일연 스님이 큰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삼국유사』를 써내려가면서
도 철학으로 포장된 그의 아집이나 아상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천 년이
지나가도 남을 중요한 책을 쓰고 있다는, 그런 망상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삼국유사』는 스님의 창작품이 아니라고. 그것은 이 땅이 낸 이야기,
이 땅의 이야기라고. 그를 공감하며 그를 스승으로 느끼며 나는 생각합니다. 그 안에 있
었던 천 년의 이야기가 지금 내 속에도 있다고. 내 안의 만파식적은 그가 전해준 이야기
에 공명하며 갈피 모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이 땅이 낸 이야기고, 그래서 내 속에, 우리 속에 있는 이야기라고. 그 이
야기는 이 땅의 기억이라고. 나아가서 우리 자체가 이 땅의 기억일지도 모른다고. 그 이
야기들을 소화하는 일은 이 땅을 이해하는 일이고 나를, 우리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시작하면서|우리는 이 땅의 기억 5

제1장 내 안의 만파식적
내 안의 만파식적萬波息笛 21
에밀레,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종이리니 27
용궁에서 온 『금강삼매경』 36
원효와 두 여인 43

제2장 나는 방랑자이자 산에 오르는 자
백월산의 전설, 그리운 것들은 백월에 빛난다! 57
백월산의 두 도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63
견훤과 왕건, 대립하는 리더 76
선화는 서동을 몰래 안고 84
단군, 손님이 신이다! 95

제3장 꿈인 줄 알고 살아갈 수 있다면
조신의 꿈 105

경주 황천, 그건 도깨비장난이었을까 114
해인사의 쌍둥이 연인불 121
늙어서도 아름다운 나무 129

제4장 저마다의 방법을 찾아서
단순하게 살기, 진주의 욱면에게 배운 일심 143
당신의 목탑, Let it be! 154
의상이라는 마니보주 164
쑥과 마늘의 시간, 고통의 연금술 173

제5장 ‘나’는 이 땅의 기억
미추왕을 아세요? 185
자장 스님과 성철 스님의 삼천배 194
탑돌이와 호랑이 신부 203
어머니를 구해낸 아들 이야기 211

마치면서|시간 밖의 시간, 백팔배 속으로 221
「비문」에 따르면 그는 말에 농담이 없고, 성품을 꾸미지 않고, 진정으로 사물을 마주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진정으로 사물을 대하셨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진정한 삶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고 존중할 줄 아는 데에 있습니다. 꽃 하나를 가꿔도, 우는 아이를 돌봐도, 물건 하나를 내려놓아도 부드러운 손이 있습니다. 그 부드러운 손으로 일연 스님은 편견 없이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써내려간 겁니다._9쪽

꼼꼼하지도 못하고 체계적이지도 못한 나는 『삼국유사』를 좋아하지만, 그가 정리한 순서에 따라 읽지는 않습니다. 그저 나는 어느 날 내게로 온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을 좋아합니다. 어느 때는 자나 깨나 달달박박과 노힐부득 이야기를, 어느 때는 자나 깨나 에밀레 종 이야기를 품은 적이 있습니다. 나를 깨운 한 편 한 편의 이야기가 너무 좋은 나는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이 땅이 낸 이야기고, 그래서 내 속에, 우리 속에 있는 이야기라고. 그 이야기는 이 땅의 기억이라고. 나아가서 우리 자체가 이 땅의 기억일지도 모른다고.
그 이야기들을 소화하는 일은 이 땅을 이해하는 일이자 나를, 우리를 이해하는 일입니다._11쪽

소리의 감동은 결코 구리나 철근의 양에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나’를 그치게 하는 소리, ‘나’를 돌이키게 하는 소리는 내가 사랑하고 매달리는 것, 없으면 안 된다고 집착하고 있었던 것, 집착인 줄도 몰랐던 그것을 제물로 일어납니다. 고통의 파도가 일어나 내 마음을 찢고 나를 파괴하고 있을 때 드라마를 보듯, 남의 이야기를 듣듯 거리를 두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경험 너머에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언가에 도달하는 길 위에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그 잃은 것이 ‘나’에게 이르는 제물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때 일승의 원음, 진리의 둥근 소리, 에밀레 종소리가 들립니다. 그대를 위해 울리는 소리가._34~35쪽

생각은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태를 해석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선입견과 편견의 창입니다. 진실은 좋고 싫은 것, 옳고 그른 것을 나누고, 판단하고, 취하고, 버리려 하는 우리 지향성 너머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해골에 담긴 물인 줄 모르고는 달게 들이켰는데 그것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안 순간 토해버렸다는 원효의 이야기는 생각이 실재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우리 생각의 무늬로 채색된 업 놀음일 뿐입니다. 스스로 만든 관념의 감옥에 갇혀 사는 거지요._43~46쪽

창원에 가면 그 산, 백월산이 있습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봉우리들이 빼어납니다. 백월이라는 그 이름은 흰 달이 비추는 달밤의 풍경을 연상시키지요? 그리운 것은 모두 백월에 있다는 듯. 가까워도 다가갈 수도 없고, 다가갈 수 없어도 가깝다 느끼는 그 거리에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리움이란 무엇일까요? 더구나 백월이 뜨는 날 호수에 비치는 산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것은 내 마음에 달이 들어, 백월이 들어 내 마음의 산을 찾게 하는 힘이 아닐까요. 『삼국유사』는 그 백월산에 두 명의 현자가 살았다고 전합니다. 부러울 것 없는 황제가 찾고자 한 그 산은 이름도 특이한 박박과 부득이라는 현자를 낸 산, 현자의 산입니다. (……)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쁨에는 뛰지 않고, 두려움에나 뛰는 가난한 심장을 가만히 지켜보면 거기, 갈 곳을 잃고 피곤에 지친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때는 산에 올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시지요. 보름을 기다리며 매일매일 달을 보십시다. 그리운 것들은 하늘에서 오고 밤하늘에 빛납니다._61~62쪽

“언젠가 제가 숲속에서 좌선하고 있는데, 거사가 그곳에 와서, 사리불이여, 앉아 있는 것이 반드시 좌선일 수는 없습니다. 몸이라든가 뜻이라든가 겉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참된 좌선입니다. 좌선은 생사가 겹쳐 있는 세계에 있으면서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마음과 그 마음의 작용을 없앤 무상한 경지에서 온갖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진리의 법을 버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세속의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온갖 소견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러면서도 37가지 수행방법으로 닦는 것이 좌선입니다. 또한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참된 좌선입니다.”
온갖 소견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보리심이 있다면, 마음과 그 마음의 작용을 없앤 무상한 경지를 안다면 굳이 계를 지키고 굳이 좌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든 법이 거기로 흐르는데._75쪽

나는 압니다. 나의 피 속엔 웅녀가 있음을, 그리하여 나는, 우리는 단군의 자손임을. 단군의 아버지는 환웅입니다. 환웅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신인 거지요. 곰에게 호랑이에게 그는 손님처럼 왔습니다. 손님이 신이다! (……)
생각해보니 손님으로 온 환웅으로 인해 웅녀는 인간이 됐고, 호랑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환웅족과 곰족의 결합이고, 호랑이족의 배척일 수 있겠으나 인간학적으로는 의미가 다르겠지요?
「창세기」를 들여다봐도 아브라함은 손님 접대를 하고 이삭을 얻습니다. 그의 조카 롯은 손님 접대를 하고 재앙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필레몬과 바우키스는 손님으로 온 제우스를 접대하고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 부부가 됩니다.
이를 들어 융이 말합니다. 손님에게 “유일하게 남은 거위를 대접하기 원했을 때 이때 그 어리석음에 축복이 내려졌다. 그 동물이 신들에게로 달아났으며, 이어 신들이 마지막 남은 것까지 내놓았던 가난한 주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그리고 어떻게 됐을까요? 필레몬의 집은 제우스 신전이 되고 그는 제우스의 사제가 됩니다.
손님이 신입니다. 모든 신은 이방에서 옵니다. 새로운 것은 이방에서 오고, 새로운 것이 올 때 우리는 몸살을 앓습니다. 혼돈을 겪는 거지요. 새로운 것의 도래는 언제나 익숙한 것의 상실과 맞물려 있으므로._94~98쪽

여자와의 삶을 위해 땅을 일구고 아이를 낳고 소박한 밥상을 앞에 놓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들이 언제부터 애타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서로의 존재를 부담으로 느끼게 됐을까요? 어느새 젊음은 저만치 가고, 젊음이 멀어져가니 쇠약해지고 병들고 자심감도 사라지고 흰머리와 함께 춥고 배고픈 생활고가 사람을 쩨쩨하게 만들고, 사랑까지 부담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바람이, 세상이, 가난이 그들의 삶을 방해합니다. 어느덧 사랑으로 낳은 소중한 아이는 다섯이나 됐는데 살림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큰아이들은 구걸을 다니고 작은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웁니다. 그러다 마침내 구걸 나갔던 아이가 개에게 물리고, 열다섯 큰아이는 굶어죽었습니다. 고운 사랑이 시켜 한 일이 이렇게 거친 삶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일을 해도 소중한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 그리하여 사랑이 고통이 되는 현실이 있지요? 굶어죽은 아이를 묻으며 울고 또 울다 결심한 여인이 결단을 합니다. 이제 헤어지자고.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잎의 이슬이요, 지란芝蘭 같은 약속도 허망하다고. 한때 그지없었던 사랑이 팍팍한 생활 속에 서로의 삶의 걸림돌이 됐다고, 여인이 정말 정리를 잘하지요? 여인이 먼저 그렇게 정리해주니 이를 어쩌나요, 조신은 반가워했답니다. 기막히다기보다 솔직하지 않나요? 그들은 아이들을 둘씩 나누어 책임지기로 합니다. 조신이 여인에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으니 여인은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거기 가면 내치기야 하겠냐고 합니다. 조신은 낙산사로 가기로 하고 가족은 그렇게 갈라집니다. 독한 현실, 아픈 이별, 생이별입니다.
울고 싶지만 눈물도 말라버린 상황에서 조신은 배고파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업고 걷다가 힘이 빠져 길거리에서 쓰러집니다. 사랑도 허망하고 이별도 허망하고 삶도 허망하기만 합니다. 죽어가는 그 시간, 삶이 뜬구름과 같다는 것을 확연히 보았겠지요?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일어나라고.
『삼국유사』는 그것을 조신의 꿈이라 합니다. 깨어보니 법당이고 하룻밤 사이에 꿈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그것이 꿈이었을까요? 혹 삶이 꿈인 것은 아닐까요? 조신은 삶이 꿈임을 알고 뜬구름처럼 잡을 수 없는 부질없는 인생의 본질을 본 현자는 아니었을까요?_110~112쪽

그는 잘나가는 사내였습니다. 유학 시절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칠 정도였으니. 최치원이 문장가라는 것은 석굴암과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을 찬탄하는 『삼국유사』의 한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성은 동악 기슭에 일찍이 절을 지었는데, 이는 해가 지려 할 때 높은 산이 먼저 알고 해가 누울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해가 누울 잠자리를 마련하는 심정으로 절을 지었답니다. 대성도, 치원도 대단하지요? 최치원은 화려한 유학을 다녀왔고 진성 여왕의 눈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중앙 귀족의 반발과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민란을 어쩌지 못해 여왕이 물러나자 그도 물러나야 했습니다. 꽃길만 걷던 그에게 얼마나 치욕이었을까요? 그는 정처 없이 유랑했다고 전합니다. 그건 세상과의 단절이기도 했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징검다리이기도 했겠지요.
자신이 감내해야 할 생의 무게를 버거워하며 번잡한 생에 대해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고독한 유랑의 길 위에 있었던 그는 생의 마지막에 마침내 인적 드문 가야산에 들었습니다. 그쯤 그는 세상사를 툭툭 털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요? 마침내 그는 거기에다 유랑생활을 함께했을 지팡이를 꽂았습니다. 마치 죽을 자리를 찾은 것처럼. 그런데 거기, 그와 함께 헤매며 방황하며 그의 무게를 지탱해준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솟은 겁니다. 그의 유랑이, 그의 고독이, 그의 삶이 진짜였음을 증언하듯이._130~132쪽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하는 현자가 세상에 나와 던지는 어떤 한 마디는 천 년의 시간을 넘어옵니다. 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에 끌리면 우리는 그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의 고유한 길을 더듬게 되지요?
통일된 신라를 굳건히 하고자 한 문무왕이 성벽 쌓는 일을 의상 스님에게 의논하며 도움을 구하자 의상 스님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왕의 정치가 올바르면 땅 위에 선 하나 긋는 것만으로도 성벽을 삼을 수 있지만, 왕의 정치가 그릇되면 철통같은 성벽 속에서도 백성의 안위를 지킬 수 없는 법입니다.”
저 통찰과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는 어떤 길을 걸어 우리가 아는 의상이 됐을까요?
저마다 고유한 길이 있지요? 자신만의 고유한 그 길은 자기 자신이 되는 길입니다. 어쩌면 원불사상은 그 고유성과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_164~165쪽

우리는 하늘에서 왔습니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신시神市를 세운, 하늘의 아들 환웅이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곰이었다지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되고 싶어했던 곰과 호랑이가 같은 굴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곰을 토템으로 했던 부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했던 부족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새로운 강성 부족이 짠, 하고 나타나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혼맹을 맺어 강인한 부족국가가 되면서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을 밀어낸 이야기일 거라고.
그 역사적 상상력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 내 관심은 ‘신화’입니다. 그러니 관점이 바뀌네요.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쑥’과 ‘마늘’, 그리고 ‘동굴’이라는 은유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인간이 되고자 신웅神雄에게 빌었던 그들에게 하늘이 준 것은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였습니다.
재미있지 않나요?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그들에게 하늘이 일차적으로 준 것은 그들이 원했던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보다는 삼키기 어려운 쑥과 마늘, 그리고 견디기 어려운 동굴의 시간 100일이었습니다.
살다보면 인내해야 할 일이 많지요? 쑥과 마늘처럼 목으로 넘기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쑥과 마늘을 피해 갈 수 있는 인생이 있을까요? 나는 지금도 종종 고통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죄의 결과거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증거라고 믿었을 때는 고통을 그 자체로 대면하지 못하고 고통에 쉽게 동요하거나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왜 이리 어려우냐고, 죄지은 것도 없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고통을 견딜 힘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왜 ‘나’냐고 항변한 거지요?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오만이었습니다. 왜 고통이 ‘나’만을 피해 가야 할까요?_173~176쪽

서산 대사가 말합니다. “예배한다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다.禮拜者敬也伏也
참된 성품을 공경하는 것이며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恭敬眞性屈伏無明”
이상합니다. 절을 하면 겸손해지고 고요해지고 순해집니다. 절을 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욕심으로 어두워진 마음을 거둬내고 겸손한 마음으로 길을 간다는 것일 겁니다. 욕심과 노여움으로 어지러워지면 길을 잃게 되니.
누더기 옷도 초라하지 않고, 차릴 것도 없을 만큼 소박하기만 했던 식사도 넉넉하기만 했던 스님의 진면목은 불사로 화려해진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에서조차 찾을 길 없는데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그가 열반에 든 지. 세월은 정말 빠르고도 무정합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생전에 그토록 삼천배를 시켰던 것일까요. ‘나’를 바로 보지 않으면 ‘성철’도 ‘조사’도, ‘부처’도 모두 헛거라고. ‘나’를 바로 보지 못하면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겠냐고._199~200쪽

복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복의 근원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닌 것 같습니다. 복의 근원은 수치와 두려움까지 감당할 수 있는 진실의 힘입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허무하기만 하니까요._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