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편지』 1호. '문고본'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어릴 적에 안방 한구석에 쌓여있는 아버지의 오래된 책 무더기를 훑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글과 한자가 뒤섞여 세로로 인쇄된 책들이 대부분이라 세상에 이런 책을 어떻게 읽나 싶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옛날 책은 다 이랬어!”
그런데 분명한 기억 중 하나는 아버지의 그 수많은 책들 중에 어린 제 손으로 펼쳐들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크기가 작은 책이 여럿 있었다는 겁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누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 쾨쾨하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냄새…….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제가 대학생이 된 뒤에야 그때 그 작은 책들이 ‘문고본(文庫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전총서

우리나라 문고본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서삼경』 등을 써서 소매 속에 넣고 다니던 수진본(袖珍本), 육당 최남선 선생이 운영하던 신문관에서 발행한 ‘십전총서(1909년)’가 우리나라 문고본의 효시라고 하지요.
이후 문고본은 1970년대 중반 무렵, 약 30여 개 출판사에서 1,000종에 가까운 신간이 발행되었습니다. 대학이 대중화되고 지식을 필요로 하는 독자들이 늘면서 책의 수요도 그만큼 늘었던 거죠. 당시 ‘삼중당문고’ ‘을유문고’ ‘서문문고’ 등의 문고본을 한 권도 안 사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문고의 전성시대’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삼중당문고 

한 예로 당시 2백 원 정가로 5백 종까지 발행했던 ‘삼중당문고’는 연간 2백 5십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던 삼중당문고, 친구 집에서 훔쳐오다시피 해 읽던 ‘을유문고’……. 하얗게 센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문고본을 추억하는 지금의 어르신들이 그때 그 독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고본의 인기는 빠르게 사그라졌습니다. 한글 전용화 정책이 도입되고,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전환되고, 인쇄 형태가 전산화되면서 출판계에 대변화가 불어 닥친 것이죠. 여기에 우리나라 경제가 안정을 찾으면서 가격 부담을 덜 느낀 독자들이 양장 단행본을 선호하기 시작하자 문고본은 거의 사장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다행히 아주 인기가 높았던 문고본들이 일부 단행본으로 다시 출판되긴 했지만 ‘문고본의 증발’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죠.

2013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행하는 문고본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프랑스 문고판의 번역서인 ‘시공디스커버리총서’, 고전 명작 중심의 ‘범우문고’, 교양과 고전에 초점을 맞춘 ‘책세상문고’, ‘지식의 백과사전’을 목표로 가장 많은 출간종수를 자랑하는 ‘살림지식총서’ 등이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 문고본들이죠.

살림지식총서

그런데 이른바 ‘출판 강국’이라고 불리는 선진국의 상황은 우리와 사뭇 다릅니다.
선진국에서는 고전과 명작을 널리 보급하는 수단으로 또는 하드커버 단행본으로 펴낸 책을 2차 출판하는 형태로 ‘문고본’이나 ‘페이퍼백’을 발행합니다. 그리고 각 나라마다 대표 문고가 있어 그 나라의 독서문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지요.

독일의 레클람문고

독일의 ‘레클람문고’(1867년), 일본의 ‘이와나미문고’(1927년), 영국의 ‘펭귄북스’와 미국의 ‘포켓북’(1935년), 프랑스의 ‘끄세즈문고’(1941년) 등이 대표적이죠. 특히 일본의 경우, 약 2백 여 시리즈에서 연간 약 1만 종이 발행되고 있으며 문고가 전체 도서 판매량의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형서점에 문고본으로만 구성된 층이 따로 있지요.

이렇게 문고본의 발행량과 판매량이 크다 보니 선진국의 서점에서는 문고본이 주요 품목으로 취급됩니다. 출판인에게는 보람이요, 판매자에게도 가치 있는 상행위로 인식되지요. 그 나라의 지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라고 할까요?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된 지 벌써 한참 되었습니다. 기초 소양이 부족하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심화되면서 지식의 변화 속도 또한 빠르게 변하고 있지요.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서 ‘기초를 잡고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이른바 지식 융합의 시대! 이런 점에서 문고본은 가장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고전과 문학, 각종 교양을 집약한 책, 지식의 계보와 핵심을 명쾌하게 정리한 책, 새로운 지식이나 동향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책, 어디서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문고본은 이러한 의도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출판 형식이요, 장차 인문학의 부활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지적 무기 중 하나입니다.

두꺼운 책에 지쳐 편하게 꺼내 읽어도 좋고, 내 마음에 드는 주제만 골라 한 권 두 권 소장하는 재미로 모아두어도 좋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누구나 공평하게 지식과 정보를 나누고, 문학과 철학을 주제로 깊이 있는 소통이 이루어지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다시 한 번 꿈꿔봅니다.

- 살림출판사 지식총서팀 최진 팀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