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문학 돌파구는 게임에 있다
▶ 대표적인 온라인 게임 ‘리니지’의 캐릭터들.
상식이지만 20세기까지 이야기 예술의 핵심은 단연 소설이었다. 하지만 21세기 길목의 지금 아날로그의 재래식 소설 장르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란 유령과 맞서느라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기술을 표현수단이나 매체환경으로 받아들인 이야기 예술. 1995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디지털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을 통해 알려진 이 신조어는 아날로그 소설로는 담아낼 수 없는 낯선 이야기 예술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사(스토리 혹은 내러티브) 대전환을 주도한 대표적인 장르가 바로 영화와 게임이다. 보라. 한국영화의 도약은 눈부시다. '친절한 금자씨'의 주제의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육박하고, '웰컴투 동막골'에서는 국가보안법을 뛰어넘어 남북한 병사가 힘을 합쳐 연합군 폭격기를 공격하는 문제적 장면까지 등장한다.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이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동안 영화는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게임이 있다.
두 책의 저자인 이인화와 한혜원은 게임이야말로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꽃이며 문화산업의 중추라고 주장한다. 한혜원의 현란한 수사(修辭)를 빌자면 "구텐베르크 시대(활자 시대)를 넘어 디지털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새 은하계의 중심에 게임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온라인 보급률과 속도를 기반으로 인터넷 온라인 게임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혜원(가톨릭대 강사)의 경우 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를 맛깔나게 정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게임을 소설.영화 등 기존 서사의 연장으로 이해하려는 서사학(narratology)과, 새로운 디지털 기술이 만든 시뮬레이션 경험으로 이해하려는 게임학(ludology)이 서로 대립 중이다. 중요한 것은 두 입장 모두 게임을 새로운 서사양식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와중에 이인화는 한혜원의 논의를 바탕으로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인 '리니지2'를 촘촘히 분석한다.
'영원한 제국'의 작가이자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인 그는 알고보면 세계의 정상급 게이머. 사이버 공간에서 이 교수는 게임 '리니지2' 칭기즈칸혈맹의 군주였다. 그런 그는 게임에서 음악.음향.그래픽 등 이질적인 예술들이 어우러지는데 주목한다. 캐릭터를 정하고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눈과 귀와 손가락의 감촉이 동시다발로 그 사이버 공간을 나만의 세계로 품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라면 세 시간 장편소설도 하루 정도면 독파하지만, 게이머는 적어도 1000 시간 이상을 리니지 월드에 쏟아 붓는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게임 '길드워' 스토리 작업에 참여하기도 한 이 교수는 이런 몰입이 가능한 이유를 게이머가 주인공을 곁에서 관찰하며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적대자들과 맞서는 데서 찾는다. 이때 주인공은 대부분 목표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나는데, 게임의 공간은 단순 배경을 떠나 게이머 삶의 현장이다. 성별도 국적도 사라진다. 혈맹이나 길드에 가입하는 순간 게이머는 새로운 삶의 규칙과 연대의식을 맛본다.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4100여 년 전 가장 오래된 이야기인 '갈가메쉬 서사시'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도하는 갈래는 제각각이었지만 이야기가 사라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1세기 이야기예술의 미래는 소설과 영화 그리고 게임의 각축장이 될 전망이라는 것이 두 저자의 메시지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의 작업은 난관에 봉착한 한국문학의 돌파구를 디지털 글쓰기에서 탐색해본 기억할 만한 첫걸음이다.
두 사람의 작업을 토태로 새로운 이야기 예술의 은하계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3000원짜리의 얇은 책 두 권을 통해 영국과 미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앞서가는 전자문학 논의의 실마리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게임을 청소년들이 하는 저급한 오락으로 아는데 그치는 '디지털 정보격차'도 해소할 수 있다.
김탁환<소설가.디지털 스토리텔링학회 연구이사>
*** 휙휙 달라지는 세상 여전히 엄숙한 문단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대한 한국문단 내부의 논의는 전무한 실정. 세계를 휩쓰는 역사추리물이나 팬터지 장르도 한갓 대중소설 정도로 폄하한다. 비평 행위 역시 존재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적막강산'이다. 엄숙주의 문학관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게임 서사에까지 관심은 벅찬 듯하다. 문단이 외면한 이런 이야기 장르들에 대한 대중 반응은 폭발적이다. '다빈치 코드'에 이어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의 경우 원서를 구입하는 이들이 대폭 늘었다.
게임 '리니지2'는 누적회원이 2천만 명. 그렇다면 문학.게임.영화등 '이야기 시장'은 무한경쟁에 돌입한 셈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 문단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인 셈이다. 사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장점을 수용하는 장인적 글쓰기가 필요할 때라는 소수의견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그 점에서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의 등장은 출판계의 소중한 수확이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 wowow@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