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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시대 이야기 (큰글자살림지식총서 102)
차상철 지음 | 2015년 1월 28일
브랜드 : 큰글자 살림지식총서
쪽수 : 112 쪽
가격 : 12,000
책크기 : 163*255
ISBN : 978-89-522-3070-6-0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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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신탁통치안’이 실패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이 성공한 요인은 무엇일까?
해방 공간의 두 주역, 이승만과 하지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요인을 새롭게 재조명한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 시작된 초기 냉전 시대 미국의 세계 전략 차원의 냉전 정책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의 한국 점령 정책이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요인들을 검토・분석하는 데 중요한 목적이 있다.
미국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까지 남한 지역에 군정을 실시했다. 3년에 걸친 군정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정치적 현안이었던 미국의 ‘한반도 신탁 통치안’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은 남한 사회 전체를 소용돌이치게 만듦으로써 심각한 이념 대결과 갈등의 원천으로 작동했다.
이 책의 핵심은 ‘한반도 신탁 통치안’에 기초한 미국의 한국 정책이 미국의 의도대로 실현되지 못한 이유들을 규명하고, 나아가 ‘단독정부 수립론’이 결국 수용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해방 공간의 두 주역으로, ‘견원(犬猿)의 동반자’ 관계였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미 점령군 사령관이자 군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하지(John R. Hodge) 장군의 한국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구상과 신념 그리고 역할을 객관적으로 접근해 새롭게 재조명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프롤로그
38도선의 획정 배경과 과정
군정의 개시와 하지 장군의 ‘불가능한 임무’
한반도 신탁 통치안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
한국 문제의 국제연합 이양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에필로그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인 원자폭탄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와 히로시마(廣島)에 투하했다. 곧이어 소련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태평양 전쟁도 종식되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 아래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분할 점령을 논의했다.
38도선이 어떻게 해서 설정되었는가 하는 배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많은 학문적 논쟁이 있어 왔다. 한반도의 분할을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 사이의 “내부적인 갈등에 대한 하나의 타협적인 해결”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연합국의 전시 동맹체제의 붕괴와 냉전체제 등장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한국 분단 결정을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된 장기적인 정책 계획이나 트루먼 행정부 내의 타협의 소산이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군사적 편의주의의 산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_pp.9~10

이승만은 대중 연설을 통해 “탁치(託治)가 강요된다면, 열국의 종속민족으로 우리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타인에게 맡겨 놓는 격이 될 것”이며, 소련의 사주를 받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탁치론은 “영원히 우리 반도와 국민을 팔아먹으려는 가증스러운 행동”이라고 규탄하면서, “반탁 시위는 당연하다”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한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려는 저의를 품고 있다고 경고했다.
김구도 “전 민족이 힘을 합하여” 신탁 통치안을 분쇄할 것을 촉구했고, 특히 신탁 통치는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규정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즉각적으로 정치단체, 사회단체 및 종교계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신탁 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반대 투쟁이 격렬해지자, 한때나마 군정 당국은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을 다시 추방시킬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렇듯, 신탁 통치 문제로 남한의 정치 상황이 악화되어 감에 따라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하지의 입장도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다. _pp.38~39

1947년 3월 말에 작성된 한국문제담당 특별위원회의 보고서는 트루먼 독트린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즉, 독일을 비롯한 다른 중요한 지역에서 소련의 입지가 강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소련의 팽창을 억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육군부의 주장은 달랐다. 트루먼 독트린이 한국 상황에까지 확대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47년 4월 4일, 패터슨 육군장관은 애치슨 국무차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믿으며, 모든 조치들은 조기 철수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패터슨은 조기 철수가 일본과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식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계속적인 한국 점령은 미국의 입장이 매우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철수를 단행할 수밖에 없는 국제적인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점을 더욱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패터슨은 한국 문제를 국제연합에 이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미국이 한국에서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는 좋은 대안(代案)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육군부의 확고한 주장은 시기를 놓치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부터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_pp.66~67

이제 한반도에는 이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이질적인 정권 출현이 불가피해졌다. 이것은 또한 미국의 한국 정책이 궁극적으로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국제연합의 일원으로서 외부의 간섭과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통일 한국 수립이라는 트루먼 행정부의 공식적인 정책 목표가 실패하였던 것이다.
마셜 국무장관은 미국의 한국 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그의 보좌관인 미첼(Reginald P. Mitchell)에게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솔직히 고백하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가 수행할 수 없는 정책을 고수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루스벨트, 처칠 그리고 장제스가 아주 그럴듯하게 말했던 ‘자유스럽고 독립적인 한국의 건설’이라는 약속은 이행될 수 없게 되었다." _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