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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조실록 3 (살림지식총서 518)
이희진 지음 | 2017년 8월 25일
브랜드 : 살림지식총서
쪽수 : 220 쪽
가격 : 4,800
책크기 : 120*190
ISBN : 978-89-522-3715-6-0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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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 518.hwp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통일신라의 꽃을 피워낸
신라 1000년의 역사가 펼쳐진다!
문고본 최초로 시도되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 그 일곱 번째!
『신라왕조실록』1․2․3권 출간!

살림출판사에서는 지난 14년간 문・사・철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과, 과학기술・예술・실용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살림지식총서≫를 500종 이상 출간했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문고’임을 자처하는 ≪살림지식총서≫가 이번에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전 19권)’를 준비했다. 문고본으로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기획이다.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는 고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까지 반만 년을 지속한 한국사의 맥을 왕대별로 묶었다. 여기에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서고 고조선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는 요하문명도 포함시켰다. 이는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중국에 대항할 역사관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전 6권)을 2015년에 첫 번째로 선보였고, 2016년에는 고대사 편인 『고구려왕조실록』(전 2권) 『백제왕조실록』(전 2권) 『고조선왕조실록』 『가야왕조실록』 『발해왕조실록』 등이 출간되었다. 이어서 2017년에 이 책 『신라왕조실록』(전 3권)을 일곱 번째로 펴낸다.

박․석․김 세 왕족 혈통이 면면히 빚어온 신라 1000년을 펼치다!
신라는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1000년의 왕조다. 그러다 보니 다른 왕조에 비해 감안해야 할 변수도 많다. 우선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신라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며 황당한 근거를 드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왕족을 비롯한 신라 요인들의 계보와 활동 연대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이유를 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 사회는 이른바 ‘골품(骨品)’에 따라 신분을 정했고, 높은 신분을 유지하려면 불가피하게 극단적인 근친혼을 해야 했다. 이러한 극단적 계보 혼란은 활동 연대 착오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신라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저자는 피력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부정할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초기 기록은 일단 반영하여 서술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왜곡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정세 변화에 따른 고구려․백제․가야․왜와의 유기적 관계망을 중심으로 신라 1000년 사직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았다.

끊임없는 왜의 침입에도 굴하지 않은 신라의 방어력과 외교술!
한국 고대사의 관심사 중 하나로 현재 일본열도 세력의 조상인 왜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왜는 백제보다 신라와 가야가 먼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야는 결국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왜와 관계가 밀접했던 신라 초기 역사가 이른바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라와 관계된 왜의 역사를 해석할 때는 다른 나라보다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고구려・백제・가야 경우도 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경우 이들 나라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많다. 『일본서기』에서는 연표조작까지 해가며 진구황후[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어떻게 복속시켰는지 제법 구체적으로 허황한 내용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심지어 왜가 백제․고구려까지 복속시켜 이른바 삼국에 내관가를 따로 두었다고까지 기록해놓았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가 왜의 끊임없는 노략질과 침략에 얼마나 당차게 맞서고,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어떻게 맞대응해 나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저자는 신라․고구려․백제․가야 등이 왜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한 사료를 조명해 그 모순점을 바탕으로 사실 관계를 규명하여, 『일본서기』가 얼마나 우리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밝혀준다.


혁거세거서간의 신라 건국에서 문무왕의 삼국통일 완결까지!
저자는 『일본서기』의 왜곡 부분을 대조해 사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함께, 신라 역사를 왕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서술해 나라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썼다. 『신라왕조실록 1』에서는 신라건국 기원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514년(지증마립간 15)까지로 이웃 나라와 크고 작은 전쟁이나 외교적 마찰이 있긴 하지만,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려는 통치자의 노력들이 보인다. 그리고 『신라왕조실록 2』는 본격적으로 삼국통일 전쟁이 발발한 때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부분으로 당시의 전투 상황을 실감 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펼쳐놓았다. 또한, 그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장수들의 활약상을 『삼국사기』 「열전」에서 발췌한 무용담과 함께 실어 그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룬 후, 당나라와 이권다툼으로 옥신각신하던 중에 당나라 행군총관 설인귀와 문무왕이 주고받은 서신은 나당전쟁 와중의 꽃이라 불릴 만큼 명문장 중의 명문장이다.

경순왕 신라 1000년의 사직을 놓치다!
『신라왕조실록 3』에서는 삼국통일 이후부터 멸망까지 다룬다. 삼국통일 직후 왕들은 통일신라로서의 체제를 재정비하며 나라가 평화롭게 잘 운영되도록 힘썼다. 그렇지만 765년 이후, 혜공왕 대에 이르러 거듭된 반란으로 결국 왕과 왕비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 왕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불안한 정국이 150년간 계속 이어지고, 비정상적 왕위 찬탈 등 끊임없는 혼란이 빚어진다. 후백제․후고구려가 부흥한 900년대에 들어서는 신라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고, 그에 따라 세력도 약화되었다. 결국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삼국을 통합한 고려 태조 왕건에게 신라 1000년의 사직을 내놓았다. 신라는 이로써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라왕조실록 3』 부록 신라연표
기원전 57년(혁거세거서간 1) 신라 건국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고려에 넘어갈 때까지 총 56대 왕에 걸친 신라 1000년의 연표가 한눈에 펼쳐진다.
제31대 신문왕
제32대 효소왕
제33대 성덕왕
제34대 효성왕
제35대 경덕왕
제36대 혜공왕
제37대 선덕왕
제38대 원성왕
제39대 소성왕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제43대 희강왕
제44대 민애왕
제45대 신무왕
제46대 문성왕
제47대 헌안왕
제48대 경문왕
제49대 헌강왕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
제52대 효공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제55대 경애왕
제56대 경순왕
684년(신문왕 4)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계속해서 유성이 나타나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그 다음 달인 11월, 안승의 조카뻘[족자族子]되는 장군 대문(大文: 또는 실복悉伏)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그러자 남은 무리들이 신라 관리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군대를 보내 토벌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전사했다.
이때 활약했던 핍실과 관련된 이야기가 『삼국사기』 「열전」에 전해진다. 사량(沙梁) 출신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 취도(驟徒)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성은 전하지 않지만 형제 셋의 이름은 남아 있다. 맏이는 부과(夫果), 가운데가 취도, 막내는 핍실(逼實)이다. 원래 취도는 출가하여 실제사(實際寺)에서 도옥(道玉)이라는 이름의 승려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서 신라군을 기습하여 싸우는데 전투가 결판나지 않자, “나는 모습만 승려일 뿐이니,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편이 낫겠다”며 군복을 입고 이름을 취도로 고쳤다. 그렇게 해서 삼천당(三千幢)에 배속된 그는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그리고 671년(문무왕 11) 문무왕이 백제 부흥 세력을 토벌할 때, 취도의 형 부과도 큰 공을 세우고 죽었다. _9쪽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절도 없이 놀았다는 비판이 나와 있다. 그 결과 기강이 문란해지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
그렇게 태어난 혜공왕은, 원래 여자의 천성을 가졌기 때문에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여자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몰아갔다. 그래서 8살에 왕위에 오른 후, 태후가 섭정에 나섰어도 정국이 수습이 되지 않아 도적 떼가 날뛰었다는 식이다. 이것이 표훈의 경고였고, 표훈 이후로는 신라에 성인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까지 덧붙여놓았다.
혜공왕에 대해 이런 정도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당시 귀족들이 경덕왕 때부터 혜공왕 때까지 이어져온 개혁 방향에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안은 정변으로 이어졌다.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로 쳐 들어온 것이다.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김지정 등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그 와중에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김양상 등은 시호를 혜공왕(惠恭王)이라 붙였다. _75~76쪽

애장왕을 살해한 언승(彦昇)이 헌덕왕(憲德王)이다. 그는 애장왕의 뒤를 이어 809년(헌덕왕 1)에 즉위했다. 소성왕의 친동생인 그는, 790년(원성왕 6)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와서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고, 791년(원성왕 7)에는 반란을 진압하며 잡찬이 되었다. 794년(원성왕 10)에 시중, 다음 해에 이찬 관등을 받아 재상 반열에 올랐다. 796년(원성왕 12)에 병부령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고, 800년(애장왕 1)에 각간, 다음 해에 어룡성 사신(私臣)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상대등이 되며 거침없이 출셋길을 달렸다. 그랬으나 결국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_99쪽

894년(진성여왕 8) 2월, 모처럼 기회를 잡은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조를 올리자,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최치원이 이후 신라 정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열전」 ‘최치원 편’에도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 아파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중원에 이름을 떨쳤던 최치원이 말년에는 사방을 방랑하며 노닐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도 고려 태조 왕건은 그를 인정해주었으며, 고려가 세워진 후 그의 제자들을 많이 등용했다고 적었다. 이해 10월, 궁예가 600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北原)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에 들어갔다. 이때 궁예는 장군(將軍)을 자칭했으며, 895년(진성여왕 9) 8월에는 궁예가 저족군(猪足郡)과 성천군(狌川郡)을 점령했다. 이어 한주(漢州) 소속의 부약(夫若)과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도 수중에 넣었다. _159쪽


9월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침공해 들어왔다.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도 구원군 1만 명을 보냈지만, 견훤은 이 병력이 미처 도착하기 전인 11월에 신라 수도에 진입했다. 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있다가 견훤의 군대에 생포되었다. 이때 견훤은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욕보이며 약탈을 자행했다 한다. 그러고 난 다음 왕의 친족 동생[족제族弟]을 임시 왕으로 세웠다. _173쪽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여겨, 왕건에게 항복하려 했다. 신하들의 의견도 갈렸고, 왕자는 반대였다. 그러나 경순왕은 “죄 없는 백성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보내 투항을 강행했다. 왕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한다. 왕건은 다음 달인 11월,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게 했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주고, 그에게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시집보냈다. 12월에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으로 봉하여, 태자(太子)보다 높은 지위와 함께 봉록(俸祿) 1,000섬을 주었다. 그러면서 측근들도 고려에서 모두 등용해 썼고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로 고쳐 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_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