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출판사가 출판한 책 현재 2,270  
살림출판사홈 > 살림의 책 > 브랜드별 도서
고구려 비문의 비밀 (살림지식총서 563)
정호섭 지음 | 2017년 12월 29일
브랜드 : 살림지식총서
쪽수 : 254 쪽
가격 : 4,800
책크기 : 120*190
ISBN : 978-89-522-3832-0-04080
• Home > 브랜드별 도서 > 살림지식총서
• Home > 분야별 도서 > 인문사회
• Home > 시리즈별 도서 > 살림지식총서
보도자료 : 563.hwp
광개토왕비, 지안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
3대 비문에 숨겨진 고구려 역사의 비밀을 풀다!
과거시태와 현재시태의 끊임없는 대화 속의 비밀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 침탈 위협과
통일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의
맞물린 함수관계까지도……
• 한 줄 평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을 찾아 만주와 북한 지역을 수십 차례 답사한 저자가 고대사의 비밀을 풀어줄 거대한 고구려 비문을 경외심으로 마주한다. 광개토왕비와 지안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 속에 담긴 고구려의 풍습과 문화, 대륙지향적인 광개토대왕의 웅혼한 기개,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간의 세력 다툼과 외교관계까지도 1600년 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생생한 현장이 되어 돌아온다. 저자는 금석문에 깊게 새겨진 그 시대의 귀중한 사료, 고구려 비문이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을 막아낼 막강한 힘과 명분을 실어준다고 확신한다.

• 내용 소개

광개토대왕비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
광개토왕비는 414년(장수왕 2)에 아들 장수왕의 주도로 만들어진 비석이다. 비문에 광개토왕 사후 2년 동안 왕릉과 비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나온다. 광개토왕비는 현존하는 금석문 가운데 크기 면에서도 가장 크고 역사적 내용도 가장 많이 전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사 연구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1차 사료로서 얼마 없는 문헌 자료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게 해준다. 광개토왕비는 보통의 비석문과는 다르게 총 4면에 기록을 담고 있는데 고구려 건국과 왕계, 광개토왕의 훈적과 대외 관계, 고구려 수묘제 운영 등의 내용으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저자는 광개토왕비가 담고 있는 3부의 구성 내용 중 어느 부분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이에 따라 능비설, 신도비설, 훈적비설, 수묘제 창출과 관련한 송덕비설, 수묘비설, 훈적과 수묘의 내용이 모두 포함된 복합비설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다며 이를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저자의 의견을 개진한다. 저자는 광개토왕 사후 장수왕이 2개의 비석, 즉 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한 훈적비와 부왕의 왕릉 수묘를 위한 수묘인연호비를 세우려다가 둘을 한 비석에 합쳐 기록했다고 보는 주장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이를 지지한다. 결론적으로 “훈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인다”라는 구절, 그리고 이후 내용이 정복 전쟁과 수묘제 정비라는 두 가지 업적을 병렬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비의 성격은 훈적비에 가깝다고 피력한다.
광개토왕비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자료로서 고구려의 건국・세계・신화・천하관・대외 관계・군사 활동・수묘인연호 등 많은 내용을 알려주는 동시에 고구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아시아 최대 석비라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가 4~5세기 동북아시아 역사를 이끌어간 한 축이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신라・백제・가야・왜 등이 고구려의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2012년 7월 29일 지안고구려비를 발견하다!
지안고구려비가 2012년 7월 29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서 발견되었다. 지안시 마셴향 마셴촌에 있는 마셴허 강가에서 마사오빈이란 한 주민이 발견했다. 포도를 재배하기 위해 기둥 재목으로 쓰려고 강가에서 주어온 돌이었는데 바로 그것이 지안고구려비로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지안고구려비는 광개토왕비에 비해 마모와 훼손 정도가 매우 심하다. 장기간 하천 바닥에 묻혀 있었던 비의 앞면은 글자의 형태가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었지만, 노출된 앞면 윗부분과 뒷면은 비바람과 강물에 깎여 비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지안고구려비의 공개된 탁본을 살펴보면 크기가 다른 글자들이 적지 않다는 점, 각 행의 세로줄이 바르지 않다는 점, 글자의 모양과 서체가 일관성이 없다는 점, 비문의 크기에 비해 새겨진 깊이가 매우 얕다는 점 때문에 연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 지안고구려비는 지안시박물관 로비의 거대한 유리 상자 안에 전시되고 있어서 비문에 대한 자세한 관찰이 불가능한 상태다. 정확한 판독을 위해서는 비를 직접 정밀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국내 학계는 지안고구려비 조사 기회를 제공받지 못해 비문의 탁본 사진에 의존하여 판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특히 동북공정 등 중국과 역사 갈등 문제가 한・중 공동 연구를 가로막는 객관적인 조건이라 할 것이다.
지안고구려비는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건국신화, 수묘제 등과 관련하여 유사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구절에서는 광개토왕비에 보이지 않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에 저자는 지안고구려비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동시기의 금석문인 광개토왕비의 수묘인연호 기록과 면밀히 비교・검토하여 분석한다. 그 결과 광개토왕비의 비문은 바로 수묘인연호의 차착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건립한 묘상입비와 수묘인 매매 금지를 교령의 형태로 선포한 지안고구려비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라고 유추한다. 묘상입비, 지안고구려비 모두 수묘제를 정비한 광개토왕의 업적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여 시기를 따지자면 ‘묘상입비-지안고구려비-광개토왕비’ 순서로 건립된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이미 지안고구려비와 광개토왕비에 ‘묘상입비’라는 구절이 등장하고, 지안고구려비의 수묘인 매매 금지령이 광개토왕비에서 똑같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지안고구려비가 광개토왕 대에 건립되었다고 본다면 지안고구려비는 광개토왕비보다 앞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구려비라 할 것이다. 지안고구려비의 건립 시기와 성격을 확정하려면 향후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묘상입비의 실물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데, 저자는 하루라도 빨리 묘상입비의 실물이 발견되기를 고대한다.

고구려의 한반도 진출 충주고구려비에 남기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 석비인 충주고구려비는 과거 중원고구려비라 불렸었다. 충주고구려비는 1979년 4월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발견되었다. 현재의 충주는 삼국시대에 그곳을 국원성이라 했는데, 당시 국원성은 고구려가 신라와 가야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죽령, 계립령, 추풍령 방면을 통해 신라를 공격할 수 있는 요지라 할 수 있다. 충주고구려비 발견 당시 신라비일 것으로 추정했지만 ‘고려태왕(高麗太王)’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라는 글자가 판독됨으로써 고구려비임이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인 충주고구려비는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충주고구려비는 마모가 심하여 앞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판독이 매우 어려운 상태지만, ‘오월중고려태왕조왕(五月中高麗太王祖王)’ 구절에서 고구려의 국명이 고려로 기록된 것은 후대의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근거가 되는 대목이다. 충주고구려비는 한반도 남부의 유일한 고구려비라서 비의 건립 목적이나 성격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충주고구려비는 공적비, 정계비또는 척경비, 순수비, 회맹비 등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어 있다. 가장 주목되는 견해로는 고구려와 신라 간의 회맹비로 파악하는 것이다. 고구려 왕이 신라 왕을 국원으로 불러들여 회맹한 후 그 내용을 비석으로 세운 것은 고구려의 국원 진출과 무관할 수 없는데 여기서 고구려가 신라를 회유하고자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고구려가 남진 거점으로 국원 지역을 차지한 것은 비단 신라만이 아니라 백제까지 염두에 둔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충주고구려비는 고구려의 중원 지역 진출 상황, 그리고 신라와 백제의 경계 영역을 점유한 고구려가 외교 활동과 군사 작전을 수행해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충주고구려비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자리했던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넓힌 사실을 증명하는 유력한 근거다.

고구려가 현재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고구려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처럼 과거에 대한 분석은 곧 현재와 미래의 정치․경제․사회의 입지에 투영된다는 점에서 저자는 다음 4가지로 압축하여 그 의미를 되새긴다.
첫째, 동북아시아에서 과거 역사를 두고 일종의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가지는 의미는 막중하다. 근래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 교과서 문제뿐 아니라 우리나라 내부에서도 상고사나 고대사, 현대사를 두고 역사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역사에 관한 것만이 아니어서, 그 배경에는 국가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현재와 미래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가속화하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국경을 넘어선 이주가 전 지구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는 다종족 국가로서 다양한 이주민을 포용하여 주변의 다양한 종족들과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교류하거나 융합하면서 국가를 발전시켜나갔다. 우리는 고구려의 포용 정신을 배워야 한다. 셋째,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맡겨진 역사적 책무 중 하나는 분단국가를 통일국가로 만드는 일인데 고구려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해볼 수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인 국가로 고구려를 꼽을 수 있다. 고구려인의 진취적인 기상은 곧 21세기 우리 청년들에게 요청되는 중요한 덕목이다. 넷째,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이 세력 다툼을 하는 상황에서 고구려를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고민할 때, 우리는 고구려가 독자성과 보편성, 개별성과 국제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버무려냈는지 그 흔적을 따라야 한다.
고구려를 과거의 영광스러운 역사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 진정한 역사적 의미와 화두를 던지는 실체로 받아들일 때 고구려의 진면목은 우리 눈앞에 오롯이 되살아날 것이다.
• 차례

들어가며: 고구려 비문의 비밀을 찾아서 3
제1장 광개토왕비의 비밀 9
제2장 지안고구려비의 비밀 115
제3장 충주고구려비의 비밀 187
나가며: 오늘날 우리에게 고구려가 가지는 의미 229
참고문헌 238
• 책 속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 속 국가 가운데 가장 기억하고픈 나라를 택하라고 하면 아마 고구려가 1, 2위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한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에 걸친 넓은 영토를 영유한 동시에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을 가진 나라, 동북아시아의 한 축을 형성한 국가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멸망 과정도 당시 최대 강국인 수(隋)와 당(唐)이라는 제국과 수십 년에 걸쳐 맞서 싸우다가 내분으로 무너졌으니 사람들의 기억에 아쉬움으로 남을지언정 적어도 치욕스럽게 기억되지는 않는다._3쪽

이처럼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긴 비석은 중원 지역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사례고 크기도 거대해서 광개토왕비는 형태면에서 매우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구려 시대에 제작된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가 모두 4면비여서 그동안 이를 두고 고구려적인 특성이라고 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지안고구려비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인식에 재검토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다. 광개토왕 또는 장수왕 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지안고구려비가 중국 후한(後漢) 시기 이후 주로 유행했던 규수형(圭首形: 상단부를 삼각형 모양으로 만든 형태) 2면비였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지안고구려비처럼 잘 다듬은 자연석을 이용해 비를 받치는 대좌(臺座)・비문을 새기는 비신(碑身)・비신을 덮는 개석(蓋石)을 갖춘 규수형 2면비가 제작되기도 했고, 광개토왕비나 충주고구려비처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한 4면비가 제작되기도 했던 것이다._18~19

비의 첫 번째 부분인 1부는 고구려의 건국과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에 이르는 3대의 왕위 계승, 17세손 광개토왕의 행장에 관한 간략한 기술이다. 두 번째 부분인 2부는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인 3부는 ‘묘상입비’를 비롯한 수묘제(守墓制) 정비와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 고구려 시대에 왕릉과 같은 특별한 묘를 지키는 사람들을 차출하던 가호. 또는 수묘인이 소속된 가호)의 구성, 그리고 그와 관계된 매매 금지령 같은 법령을 담고 있다._59쪽
그런데 구민이 수묘역에서 제외된 상황에서 제령(制令) 형태로 매매 금지 조치가 내려졌으므로 매매 대상은 신래한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광개토왕은 신래한예로 수묘인연호를 완전하게 개편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수묘인 매매 문제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바로 복속한 지역의 민은 전쟁포로와 같은 성격도 있었다. 따라서 신래한예로 구성된 하호는 구민보다 사회경제적 위상이 낮았을 것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인신 매매 문제까지 고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자신이 새롭게 경략한 지역에서 데려온 신래한예에 대한 매매 금지를 좀 더 염두에 두고서 제령 형태로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시 말해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수묘인 매매 문제의 핵심은, 구민이 수묘인 편제에서 제외되는 상황에서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 징발한 신래한예에 대한 강력한 매매 금지 조치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_99~100쪽

광개토왕비가 기본적으로 훈적비라는 견해 또한 다수 연구자가 제기했다. 비문 내용 중 “훈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인다”라는 구절에 주목하여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세워진 비로 이해한다. 비의 내용상 광개토왕의 주요 업적은 정복 전쟁이며, 이를 통해 얻은 결과물이 수묘인연호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광개토왕비는 형식적으로는 묘비나 능비지만, 왕의 정복 사업이라는 훈적과 묘상입비나 매매 금지를 포함한 수묘제 정비에 힘쓴 왕의 훈적을 동시에 기록한 훈적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묘상입비와 매매 금지령 등 수묘제 정비도 광개토왕의 훈적이기 때문에 정복 전쟁 내용에 이어 기술된 것이다. 한편 광개토왕비가 선왕의 훈적이나 왕릉 수묘인연호 개편 중 어느 하나를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왕가의 계보와 더불어 광개토왕 행장까지 담은 종합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국가 제례의 완성을 기념하고 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상징적인 구조물로 보기도 한다. 이 견해 역시 기본적으로는 무게중심은 외치(外治)와 내치(內治)라는 측면에 두면서 훈적을 위주로 한 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_105쪽

지안고구려비에서는 묘상입비 시행에 대한 원인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전매 문제인 듯한 분위기를 내비치고 있으나 광개토왕비에서는 수묘인연호의 차착 문제로 설명하고 있어서 차이가 난다. 광개토왕비에서는 수묘인 차착 문제와 매매 금지에 관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지만 지안고구려비에서는 수묘인 매매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지안고구려비를 광개토왕 대에 제작된 묘상입비의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광개토왕비에서 언급한 수묘인연호 차착이 직접 서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울러 특정 왕릉 수묘비라면 왕릉 피장자에 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지안고구려비에는 이러한 언급조차 없다._162쪽

지안고구려비와 관련한 핵심 논의 가운데 하나는 광개토왕 대에 건립된 비인가 아니면 후대인 장수왕 대에 건립된 비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국내 학계의 견해는 광개토왕 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쪽이 우세하다. 물론 지안고구려비가 광개토왕비보다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러나 거의 동일한 내용이 광개토왕비에 먼저 작성되고 이후 지안고구려비에도 작성되었다는 정황은 어색하다. 광개토왕비라는 거대한 비석에서 강조한 내용이 또다시 지안고구려비 같은 작은 비석에서 강조되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다시 말해 광개토왕이 강조한 매매 금지가 잘 지켜지지 않아 장수왕 때 재차 강조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처벌 규정이 시행되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다. 또한 태왕(太王) 호칭을 제정하여 보편화했던 고구려 정권 아래에서 내린 교령이 두 번에 걸쳐 강조되었다면, 당시 고구려 왕권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고구려에서 최고의 왕권을 누렸다 할 수 있는 시기가 광개토왕 대와 장수왕 대다. 그런 시기에 두 번에 걸쳐 동일한 교령이 반포되고 그것이 두 개의 비석에 재차 표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보다는 광개토왕의 업적에 관해 정리하면서 기존의 비석 등에 새겨져 있던 내용을 광개토왕비 건립 시 재차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 대에 묘상입비가 먼저 건립되고, 연이어 지안고구려비가 세워졌으며, 그 후 장수왕 대에 광개토왕의 업적을 총정리하면서 두 비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광개토왕비에 포함시켰다고 이해할 수 있다._180~181쪽

충주고구려비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가 신라의 매금(마립간)을 불러 형제 관계를 맺고 ‘수천(守天)’ 의식을 거행한 뒤 의복을 하사하면서 동시에 군인 징발 같은 합의 사항과 수행 내역 등을 새긴 것이다. ‘천(天)’의 직계 자손인 고려 태왕이 신라 매금을 불러들여 상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고구려의 우월성을 과시한 셈이다. 그렇지만 비문에는 太王國土(태왕국토)와 寐錦土(매금토) 또는 新羅土(신라토)라는 용어가 대비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태왕국토와 신라의 매금토 또는 신라토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신라의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고려 태왕에 비해 신라 매금이라는 용어가 상대적으로 차별화되어 있고, 고려 태왕은 ‘동이(東夷)’인 신라 매금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우월적 존재지만 광개토왕비에 나타난 신라보다는 상대적으로 상승된 위상을 가지고 있다. 광개토왕비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 인식되었지만, 충주고구려비에서는 ‘新羅土內衆人(신라토내중인)’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고구려 속민에서 신라 매금의 백성으로 바뀌어 인정되고 있음을 가리킨다._215~216쪽

고구려는 주변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북방 민족이 세운 국가들뿐 아니라 신라, 백제, 왜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인이 보여준 이러한 국제성은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당시 고구려가 주변 국가를 상대로 기울였던 수많은 외교적 노력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고구려는 주변 여러 국가들과 전쟁을 통해서만 생존했던 것이 아니다. 이전 시기는 차치하더라도 수나라나 당나라 때도 외교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국익과 평화를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친 고구려의 모습은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외교 능력이 취약한 것으로 치부되어온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아울러 고구려 멸망 원인을 연개소문 집권기의 리더십 한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여러 이슈가 시시때때로 부각되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국가 지도층의 리더십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절실하다는 교훈 또한 얻을 수 있다._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