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계시다.

소싯적 모 심고, 사과 재배하고, 밭일에 집안 대소사까지 한 몸으로 해결하던 할머니는 거동도 불편하신데 여전히 찾아뵐 때마다 밭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신다.

기역자로 꺾인 허리에 고개만 치켜들고 걷는 할머니 모습을 그저 우습게만 보던 철부지 시절이 있었다. 당신의 인생을 손녀인 내가 무시하고 살아왔다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인생을 다 배운 듯 자신만만하던 서른 중반에 결혼을 하고 보니 엄마나 할머니가 살아온 여자로서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농촌으로 시집 와서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낳고, 지지리도 궁상맞게 사셨을 텐데. 상처뿐인 영광이라 했던가. 할머니 인생에 영광이라 할 만한 경험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읽는 내내 할머니를 생각하게 한 책이 있다. 표지 사진 한 장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책.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는 수십 년을 몸뚱이 하나로 거칠고 투박하게 살아온 12가정의 어르신들의 삶을 ‘나눔’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냈다.

사발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고물을 주워다 파는 노부부, 계단 밑 자투리 공간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터를 만들고 담배 파는 버거씨병(폐쇄성 혈전혈관염) 환자. 폭격을 맞은 듯 반쯤 내려앉은 집에서 살아가는 이재민촌 주민 할머니……. 구구절절 시리고 아픈 과거에 상처받아 마음이 좁쌀만큼 오그라들었을 법도 한데, 오히려 꼬깃꼬깃 접어 모은 쌈짓돈을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었다. 고작 만원 한 장이라도 아무런 동요 없이 누군가를 위해 쓰기가 얼마나 버거운 세상인가. 전화 한 통화만으로도 기부 대열에 들 수 있는 세상인데 그마저 귀찮아했으니 얼마나 이기적인 삶이었는지.

“뭐 있나요,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만약 저에게 이웃이 없었다면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었을까요? 조금 늦긴 했지만 네 이웃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과 같다는 그 뜻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습니다.” -p.56

금전적인 빚보다 더욱 부담스러운 마음의 빚. 이들은 한결같이 가장 어려울 때 받았던 주변의 따스한 손길을 잊지 못해 갚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김영권, 배추선, 노윤희, 이공심, 이옥선, 유영빈, 정외순, 왕재철, 김춘성, 양부억예, 장봉순, 모복덕, 채동만, 김옥환, 김성공. 이분들의 이름 뒤에 조용히 올려보는 내 할머니의 이름 김후분.
볼에 보톡스 맞고 이마에 부채 넣는 뭇사람보다 훨씬 정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