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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4 인조~정조 편(큰글자 살림지식총서 164) (큰글자살림지식총서 )
이성무 지음 | 2021년 12월 31일
브랜드 : 큰글자 살림지식총서
쪽수 : 206 쪽
가격 : 15,000
책크기 : 163*256
ISBN : 978-89-522-4358-4-0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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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과 탕평의 시대
『조선왕조실록』 4권에서는 반정으로 왕에 오른 제16대 인조부터 탕평책과 정치 개혁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제22대 왕 정조까지 7대에 걸친 177년간의 기록을 담았다.
이 시기는 명분과 왕위 정통성 문제로 얼룩진 당쟁, 당쟁을 왕권 강화로 이용하려는 탕평의 역사다. 인조반정과 정묘호란·병자호란, 북벌 정책은 청을 배척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명분으로 했다. 또한 왕이 상복을 입는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예송논쟁은 왕위 정통성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당쟁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숙종은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으로 노론과 소론을 적절히 이용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영조는 탕평책을 기반으로 강력한 전제 군주가 되었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정조는 규장각 설치, 초계문신 제도 도입, 현륭원 이장, 장용영 강화, 화성 축조 등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의문의 죽음으로 탕평책은 종말을 맞이했다.
제16대 인조, 서인의 시대가 열리다
제17대 효종, 북벌을 꿈꾸다
제18대 현종, 예송 정국을 맞이하다
제19대 숙종,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하다
제20대 경종, 격화된 노소 당쟁에 희생되다
제21대 영조, 탕평의 시대를 열다
제22대 정조, 정치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다
중종은 반정이 일어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추대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에 비해 인조는 반정 과정에서 군자금을 대기도 하고 반정 당일에는 군사를 직접 지휘할 정도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평소 무예에 능하고 인망도 높았던 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그 충격으로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마저 병을 얻어 죽으니, 인조는 광해군과 대북 정권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대적인 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제일 먼저 참형을 당한 사람은 상궁 김개시였다. 광해군의 총애를 미끼로 마음대로 권세를 부렸던 탓이다. 아울러 유희분(柳希奮)・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박엽(朴燁)・정준(鄭遵) 등 대북 정권에서 권세를 누리며 서인의 미움을 샀던 인물이 줄줄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으며,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_pp.16~17

실제로 『경국대전』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장·중자 구별 없이 1년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해서 장자부는 1년복을, 중자부는 9개월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들을 위해서는 장·중자를 구별하지 않으면서 며느리를 위해서는 장·중자부를 구별했던 것이다.
일찍이 송시열이 “효종대왕은 인조의 서자라 해도 괜찮다”는 말을 했고, 현종은 이를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송시열의 한마디는 부왕인 효종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통성마저 위태롭게 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인은 이 말을 빌미로 정국을 뒤집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도신징의 「상소」는 바로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었다._p.69

정유독대 후 경종은 세자 신분으로 숙종을 대신해 정국을 운영했다. 이 시기에도 노소 간 대립은 변함없었다. 그러나 이이명의 독대 이후 숙종이 노론을 두둔해 정국은 노론 편향적으로 전개되었다. 자신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던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자, 경종은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노론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후에도 여전히 정권은 노론이 독식하다시피 했다. 노론의 위세에 눌려 경종은 어떠한 결정도 자신의 의지대로 내릴 수 없었다.
노론은 경종이 즉위한 지 겨우 1년 만에 세제 책봉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1721년(경종 1) 8월, 사간원 정언 이정소(李廷熽)는 「상소」를 올려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자고 건의했다. 경종에게 후사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_pp.116~117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실천해나갔다. 1788년(정조 12)에 친위 군영인 장용영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1789년(정조 13)에 영우원(永祐園: 사도세자의 묘)을 새롭게 단장한 것이 시작이었다.
정조는 군주가 군권을 일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왕권 강화에 필수 요건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장용영 설치는 중요했다. 규장각이 정조의 친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라면, 장용영은 정조 정권을 유지·강화하기 위한 무력 기반이었다. 외척의 위협 속에서 즉위한 정조였기에 누구보다 친위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_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