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목도리에 가슴노출까지 
30년대 서울엔 개성·낭만이
김기철기자  kichul@chosun.com  

입력 : 2005.02.02 17:47 29' / 수정 : 2005.02.02 20:31 20'

‘썰은 치마’(미니 스커트)와 퍼머 차림의 모던 걸, 할리우드산 스윙재즈와 사교 댄스, ‘문화주택’(신식 양옥) 거실에 놓인 피아노…. 서울대 국문과 출신 소장학자 6명이 그려낸 1930년대의 경성(서울)은 일제의 수탈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만 점철된 우중충한 시대가 아니라 낭만과 개성이 가득한, 알록달록한 총천연색이다. 
‘삼천리’, ‘별건곤’, ‘조광’, ‘신여성’ 등 1920~30년대 잡지와 당시 문학 작품들을 토대로 소장학자들이 펴낸 소책자 6권(살림출판사)은 제목부터 통통 튄다.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김주리)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김미지) ‘스위트 홈의 기원’(백지혜) ‘대중적 감수성의 탄생’(강심호) ‘에로 그로 넌센스’(소래섭)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이승원)이다. 

“1930년대 한국은 재즈와 춤, 그리고 사교댄스가 범람하던 시대였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에게 재즈와 춤은 쾌락 이전에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도구이자 삶을 위안하는 촉매였다.” 이승원 인천대 강사는 “김기림과 이효석, 염상섭, 김남천도 에세이를 쓸 때, 재즈를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재즈는 대유행이었다”고 말한다. 

당시에도 요즘 ‘춤짱’으로 통하는 가수 비에 못잖은 대중 스타가 탄생했다. 소래섭 가톨릭대 강사는 “만담을 담은 ‘넌센스 음반’이 유행했는데, 당대 최고 스타였던 신불출의 인기는 가수 비 못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정지용, 이상, 백석 등의 시인들을 배출한 1930년대는 요즘을 능가할 정도의 전성기였으며, 대중매체나 오락 분야도 자유롭고, 활기 넘치는 시대였다. 

김주리 아주대 강사는 여우털 목도리는 물론, 과감한 가슴 노출까지 시도한 ‘모던 걸’들의 패션을 예로 들면서 “이런 패션은 100가지가 넘을 만큼 다양했고, 신여성들은 ‘패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했다. 

강심호 광운대 강사는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서’란 수필에서 낙엽 타는 냄새로부터 커피향을 떠올리는 대목이 나온다. 이걸 그의 서구적 취향으로만 볼 게 아니라, 당시 커피가 그만큼 보편화됐다는 걸 설명한다”고 말했다.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이제 서른 줄에 들어선 공통점을 지닌 이들 은 신범순 서울대 국문과 교수의 지도아래 대학원에서 1930년대 풍속사 연구를 시작했다. 신 교수는 “계급 구조 등 거시적 틀로만 당시 작품과 사회를 볼 때, 구체적인 일상은 사라지고 뼈다귀만 남는 연구 풍토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면서 “당시 작품과 잡지, 신문 기사 등을 통해 1920~30년대의 다양한 모습을 짚어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1930년대의 낭만과 다양성을 근대와의 접촉이 빨랐던 일부 ‘모던 걸’, ‘모던 보이’의 호사·퇴폐 취미로 몰아갈 수도 있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해 “근대를 이끌고 나간 추진력은 결국 도시였다”면서 “1930년대 경성은 현재의 도시화, 근대화의 원형을 찾을 수있을 정도로 이런 근대적 문화가 보편화된 도시였다”고 답했다. 신 교수는 “거시적인 틀을 해체하기 위해 풍속사를 연구했는데, 이제는 근대의 이런 다양한 모습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해석학적 틀을 구축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에로 말할때 30년대가 빠져서야…
화장하는 남자… 모델하우스…
미시적 추적으로 세태 고스란히

  
대중잡지 '별건곤' 1927년 2월 호에 '엽기문사의 신직업'이란 제목으로 실린 만문만화(漫文漫畵). "기생잡지에 네 이름으로 원고 하나 써 줄게. 너… 키스 하나 주렴…." "벌써 C선생이 하나 써 주기로 약속해 놓았다나."  
A:에로가 빠져서는 안 될 터인데….
B:그럼요, 이번 ‘○○’를 봐요. 그렇게 크게 취급한 ‘재만 동포문제’니 ‘신간회 해소문제’니 하는 것은 성명이 없어도 ‘침실박람회’는 간 데마다 야단들입니다. 
C:참 ‘○○’ 이번 호는 그 제목 하나로 천 부는 더 팔았을 걸… 그렇지만 너무 노골적입디다.
D:그래도 글쎄 그렇게 안 하곤 안 돼요. 잡지란 무엇으로든지 여러 사람 화두에 오르내릴 기사가 있어야 그거 어느 잡지에서 보았느냐 어쨌느냐 하고 그 책을 찾게 되지….
E:사실이야. 아무래도 번쩍 띄는 큰 ‘에로’ 제목이 하나 있어야 돼. 더구나 봄인데.

1920년대부터 흥사단의 국내 조직처럼 활동하던 수양동우회 기관지 ‘동광(東光)’ 1931년호에 실린 한 소설은 당시 잡지회사의 편집회의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대중문화에 ‘에로’라는 코드가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게 언제쯤일까. 경제가 급성장하던 70년대 이후일까, 소설가 정비석이 ‘자유부인’을 신문 연재하면서 화제를 불러온 50년대 중반일까. 30년대에 이미 조선 반도에 ‘에로’ ‘그로’ ‘난센스’라는 신조어가 대유행했다고 하니, 시작을 좀더 거슬러 올라 잡아야 할 것 같다.

일본을 통해 거침없이 서구문물이 흘러 들어오던 일제강점기의 풍속 연구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이른바 근대연구 붐을 타고 이 시기 생활사를 탐구하는 책들이 여러 권 나왔고, 현실문화연구에서 시리즈처럼 펴낸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만문만화(漫文漫畵)로 보는 근대의 얼굴’ ‘연애의 시대’ 등은 대중적인 인기도 만만찮게 누렸다.

살림출판사가 살림지식총서 150호 특집으로 30년대 풍속의 면면을 재조명한 문고본 6권을 한꺼번에 내놓으며 이 바람에 가세했다. 
교양 문고본이라 권당 100쪽이 좀 안되는 적은 분량이지만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 문화, 연애와 신여성의 행태 등 구체적인 소재를 파고 들어 당시 풍속을 매우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근대적 패션의 풍경’(김주리 아주대 강사),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여학생과 연애’(김미지 성공회대 강사), ‘스위트 홈의 기원’(백지혜 한성대 강사), ‘대중적 감수성의 탄생-도박, 백화점, 유행’(강심호 광운대 강사), ‘에로 그로 넌센스-근대적 자극의 탄생’(소래섭 가톨릭대 강사),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이승원 인천대 강사)은 당시 풍속과 문학 텍스트를 긴밀히 연관해 해석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저자들은 일찍이 이 시기 풍속에 관심을 둔 서울대 신범순 교수의 지도로 근대문학을 전공한 30대 초ㆍ중반의 젊은 학자들. 신 교수는 “근자의 일제강점기 풍속 연구들은 세태변화를 계급, 이데올로기 등 사회구조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이 거시적인 틀을 깨고 당시 문화와 문학의 다양성, 미시적인 주체성을 추적하려는 노력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 시기의 세태가 그 실상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재미있다는 것은 다른 책을 통해 이미 입증되고도 남았다. 화장하고 실크 스타킹을 신는 패션을 앞서 간 남자들, 연애편지 막기에 고심하는 교사들의 모습이나, 모델하우스가 탄생하고 피아노가 재산목록 1호로 등장하는 사연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권마다 즐비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