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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새로운 이해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10)
앙드레 라콕 & 폴 리꾀르 지음 | 김창주 옮김 | 2006년 2월 28일
브랜드 : 살림기독교
쪽수 : 572 쪽
가격 : 18,000
책크기 : 신국판
ISBN : 89-522-0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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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_우수학술도서
구약학자와 해석학자가 함께 나눈 생생한 대화!
헤브라이즘의후예라고 할 수 있는 구약학자인 앙드레 라콕과 헬레니즘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해석학자 폴 리꾀르가 만나 성서에 대한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2006년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학술도서
∙한국어판에 붙이는 머리말 6
∙머리말 10
「창세기」 2~3장
벽의 균열 24
창조를 생각하며 60

「출애굽기」 20장 13절
살인하지 말라 110
살인하지 말라: 사랑의 순종 160

「에스겔」 37장 1~4절
죽음에서 생명으로 194
절박한 파수꾼 225

「시편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250
기도로서 탄식 280

「아가」
술람미의 여인 308
결혼의 은유 345

「출애굽기」 3장 14절
계시 중의 계시 394
해석에서 번역으로 425

「창세기」 44장
요셉 이야기 468

「스가랴」 12장 10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512

∙옮긴이의 말 539
∙성구 찾아보기 546
2천 년 만에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다시 만나다

기원전 3세기에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서구 정신사를 지탱해온 두 기둥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최초로 만났다. ‘칠십인역(LXX)’으로 알려져 있는 이 번역본에는 헤브라이즘이 헬레니즘의 옷을 입은 최초의 사건, 즉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상, 역사, 사회의 만남이라는 사상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천 년이 흐른 지금 헤브라이즘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구약학자 앙드레 라콕과 헬레니즘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철학자 폴 리꾀르가 ꡔ성서의 새로운 이해: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ꡕ에서 만나 인류 최대의 유산인 ‘성서’를 이야기한다.

ꡔ성서의 새로운 이해: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ꡕ는 20년이 넘도록 학문적인 교류를 나눈 구약학과 철학의 두 거장의 대화로 탄생한 책이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서’를 통해서 만난 이들은 서로의 빈 자리를 메워주며 성서 이해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선악과’, ‘십계명’, ‘하나님의 이름’ 등 구약성서 속에서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주제들을 주석학과 해석학이라는 각자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먼저 성서학자인 라콕이 구약의 한 주제에 대하여 연구하면 철학자인 리꾀르가 그것을 읽고 철학적인 응답을 한다. 그리고 그 후에 두 저자는 상대방의 글을 읽고 각각의 글을 개정함으로써 상대의 공헌을 담고 있다.

신학과 철학의 만남,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석학과 해석학의 만남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해석학자들이 보기에 성서학자들은 성서 배후의 고고학적인 자료를 파헤치는 학문적이거나 과학적인 방식을 소홀히 여기며, 성서학자들은 해석학자들이 성서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무관심하고 그저 성서 이후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로에 대한 아쉬움을 잘 알고 있었던 라콕과 리꾀르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다. 예를 들어 성서학자인 라콕은 텍스트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해석의 기능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철학자인 리꾀르 역시 성서가 갖고 있는 텍스트의 특이성을 무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독창성이나 기독교인들의 사고방식도 부인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성서학자의 과제인 과거의 추적과 철학자의 임무인 미래의 전망 사이에서 오히려 서로의 빈 공간을 채우는 생산적인 논의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이미 1천5백 년 전에 그레고리우스(Gregorius the Great)는 다음과 같은 말로 라콕과 리꾀르의 작업을 지지해주었다. “성서는 독자와 함께 성장한다.”

리꾀르의 새로운 이해!

우리에게 리꾀르는 현대 해석학의 정점에 있는 철학자로 읽혀지고 있다. ꡔ해석의 갈등ꡕ, ꡔ악의 상징ꡕ, ꡔ텍스트에서 행동으로ꡕ 등 철학적 해석학과 관련된 그의 저서들은 우리에게도 적지 않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신학 분야에서도 철학적 해석학만큼이나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군다나 이와 관련된 ꡔ성서 해석학ꡕ, ꡔ하나님의 상징ꡕ 등과 같은 그의 주저들은 불행히도 아직까지 우리에게 번역되어 나오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는 반쪽짜리 리꾀르만을 보아온 것이다. 이에 라콕과 함께 한 이 책 ꡔ성서의 새로운 이해ꡕ는 성서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갖게 해준다는 미덕과 함께, 우리에게는 리꾀르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즐거움을 줄 것이다.

창조와 타락

라콕은 ‘창조’를 ‘사랑’으로 풀어낸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이 ‘누군가 안에 있는 그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누군가가 창조되는 것에 사랑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타락은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라콕은 이를 조화나 율법 준수의 코스모스(cosmos, 이성에 기반을 둔 조화)에서 최초의 혼돈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을 유혹하는 ‘뱀’에 대한 시각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라콕은 무엇보다도 뱀 역시 야훼의 피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탄으로서의 뱀보다 피조물로서의 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타락하여 수치를 당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뱀의 타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벌거벗은’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롬(םימורע)’과 ‘간교한’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룸(םורע)’의 발음의 유사성에서 보이는 문학적인 기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사람의 ‘벌거벗음’ 그리고 뱀의 ‘간교함’ 둘 다 주변의 환경과 멀어졌다는 것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콕의 논의에 리꾀르는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사실은 이것저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던 ‘한계’를 의미한다는 견해를 더해준다.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던 아담과 하와의 무한에 대한 욕망이 바로 이 갈라진 틈을 통하여 스며들어오는 것이다. 리꾀르는 비록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타락을 통해 생겨났지만, 이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인간의 상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처벌처럼 선악의 식별에는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리꾀르는 인간의 이런 도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음을 역설한다.

하나님의 이름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의 이름을 묻는 자들에게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 이전까지 하나님은 자신을 단지 ‘나’ 혹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만 말하였을 뿐이었다. 라콕은 이 물음을 주목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해주는 것이 ‘이름’이기에 유일신인 하나님이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다신교 전통을 갖고 있는 이집트 문화를 경험한 모세에게 ‘신의 이름’은 다름 아니라 그 신의 ‘기능’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요구한 모세의 질문은 그 이름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름에는 신현현(theophanic)과 동시에 수행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혹은 나는 곧 난다)”라는 대답에는 인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즉 구원 사건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라콕은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리꾀르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혹은 나는 곧 난다)”에 대한 번역의 난해함으로 논의를 확장시킨다. 히브리어 동사 ‘היה(hyh)’가 그리스어에서는 ‘ειναι’로 라틴어에서는 ‘esse’로 번역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만남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부터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 그리고 스콜라 철학(Bonaventure, Thomas Aquinas, Duns Scotus)을 지나 데카르트와 그의 학파, 칸트와 그 이후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그 장구한 역사를 리꾀르는 명쾌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물론 그 역사는 성서의 독자들인 우리들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리꾀르의 다음 말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겠다.

“순수한 번역이란 없다. 내 말은 본문의 수용 역사, 즉 역사 스스로가 곧 해석의 역사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