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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왕조실록 1 (살림지식총서 512)
이희진 지음 | 2016년 1월 30일
브랜드 : 살림지식총서
쪽수 : 132 쪽
가격 : 4,800
책크기 : 문고판
ISBN : 978-89-522-3321-9-0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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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꿋꿋이 독자 노선을 걸어온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참모습을 만나보자!
고구려 역사를 두고 한국과 중국이 서로 자기네 역사라고 다툴 만큼 동아시아에서 고구려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이와 같이 적지 않은 비중을 가진 고구려의 역사를 두고 중국에서는 “고구려가 중원 제국의 지방 정권으로 수백 년 동안 할거했다”는 식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전근대 중화주의적인 세계관으로 윤색된 시각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은 당시 실제 역사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러한 시각 때문에라도 고구려와 중원 제국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실제로 걸어왔던 길을 찬찬히 살펴보면 시비에 걸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난점이 있다.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그렇듯이, 고구려의 발자취를 면밀하게 복원해낼 사료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악용해서, 근거도 없는 추측만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고구려 역사를 과장해내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이는 중화주의 사관이나 식민사관에 근거해 고구려 역사를 축소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제1대, 동명성왕
제2대, 유리왕
제3대, 대무신왕
제4대, 민중왕
제5대, 모본왕
제6대, 태조왕
제7대, 차대왕
제8대, 신대왕
제9대, 고국천왕
제10대, 산상왕
제11대, 동천왕
제12대, 중천왕
제13대, 서천왕
제14대, 봉상왕
제15대, 미천왕
제16대, 고국원왕
제17대, 소수림왕
제18대, 고국양왕
제19대, 광개토대왕
주몽은 자라면서 금와왕의 아들들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자 금와왕의 큰아들 대소(帶素)를 비롯한 왕자들과 신하들이 위협을 느껴 주몽을 죽이려 했다. 이를 눈치챈 주몽의 어머니가 주몽에게 피신을 종용했고, 이를 받아들인 주몽은 졸본부여로 도망쳤다. 이때 주몽과 같이 피신했던 사람이 오이․마리․협보다. 쫓아오는 추격군을 피해 도망치는 도중에 앞에 강이 놓여 건널 수 없게 되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라 했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추격군을 따돌렸다는 점은 동명 설화와 같다.
추격군을 따돌린 후 모둔곡에 이르러 제사․무골․묵거를 만났다. 주몽은 재사에서 극 씨, 무골에서 중실 씨, 묵거에게 소실 씨라는 성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들을 이끌로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정했다.
_p.11

고구려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 소생인 호동은 용모가 수려했다. 그런 왕자 호동이 옥저에 갔다가 낙랑 태수 최리(崔理)의 눈에 띄었다. 호동이 마음에 들었던 최리는 딸을 주었다.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 정벌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호동이 낙랑 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는 군사를 이끌어 정벌했다. 태수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죽인 후 항복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는 서로 엇갈리는 기록이 많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설화가 등장하는 32년(대무신왕 15)에 낙랑이 항복했다고 하면서도 5년 후인 37년(대무신왕 20)에 왕이 낙랑을 습격해 멸망시켰다는 내용이 또다시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같은 해 낙랑의 백성 5,000여 명이 신라로 투항했다고 한다. 44년(대무신왕 27) 9월에는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는 기사도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낙랑 정벌에 공이 컸던 호동이 자살을 했다. 원인은 첫째 왕비의 모함 때문이었다. 둘째 왕비 소생인 호동을 왕이 총애하자 첫째 왕비가 호동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까 염려했다. 그래서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하려는 것 같습니다”라고 모함했다. 왕은 믿지 않았지만 왕비는 계속 우겼고, 호동은 변명하지 않았다. “만약 변명을 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왕은 처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호동은 칼에 엎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 사건 또한 『삼국사기』 편찬자에게 비난을 샀다. “대무신왕은 참소하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아들을 죽였고, 호동은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동이 죽자 태자 자리는 왕자 해우(解憂)에게 돌아갔다.
_pp.36~37

“왕은 날로 포학해져 앉아 있을 때는 항상 사람을 깔고 앉았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 삼았다. 사람이 혹 움직이면 용서하지 않고 죽였다.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로 그를 쏘았다.”
이 기록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상당히 포악한 왕으로 몰릴 만큼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모본왕 치세에는 자연재해를 당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48년(모본왕 1) 8월에는 홍수가 나서 산이 20여 군데나 무너졌다. 49년(모본왕 2) 3월에는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으며, 4월에는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폭정 때문인지 정치적인 암투 때문인지 몰라도 모본왕은 암상당했다. 시중을 들던 두로라는 자가 왕을 살해한 것이다. 두로는 왕이 시중드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자 자기가 죽임을 당할까 염려하여 통곡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사람 말에 ‘나를 어루만지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라고 했다. 임금이 포악한 짓을 해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다. 그대가 임금을 처치하라”며 왕을 죽이라고 선동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한다.
모본왕은 그렇게 두로에게 살해당했다.
_pp.44~45

251년(중천왕 4) 4월, 중천왕은 또다시 개인적인 불행을 겪었다. 시작은 긴 머리의 미인 관나부인(貫那夫人)에게서 비롯되었다. 왕이 관나부인을 총애해 소후로 삼으려고 하자, 질투에 눈이 먼 왕후 연 씨가 관나부인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고는 왕후가 “서쪽에 있는 위나라에서는 긴 머리카락이 인기이니, 머리가 긴 미인을 바치면 침략받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을 왕에게 했다.
중천왕은 왕후의 속셈을 알아채고 대꾸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관나부인이 말썽을 일으켰다. 왕후가 벌인 일을 안 관나부인은 왕에게 “왕후가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며 저를 위협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왕이 사냥 나갔다가 돌아온 날 “저를 이 속에 담아 바다에 던지려고 했다. 그러니 돌려보내달라”며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러나 중천왕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는 노해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져버렸다. 그 후로는 가족 사이의 갈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_p.89

남방 세력을 압박하던 광개토왕은 후연이 침공한 다음 해인 401년(광개토왕 11)이 되어서야 보복에 나섰다. 광개토왕이 군대를 보내 숙군성(宿軍城)을 공략하자, 후연의 평주 자사 모용귀(慕容歸)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같은 해 광개토왕은 신라에서 인질로 보냈던 실성을 돌려보내주었다. 실성은 곧 내물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으로 등극했다. 이는 훗날 고구려와 신라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실성이 보복으로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訥祇)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기 때문이다.
2년 후인 403년(광개토왕 13) 11월에도 군대를 보내 후연을 침공했다. 그러자 다음 해 정월, 후연의 황제로 등극한 모용희가 요동성을 침공해 왔다. 그런데 성을 공략하던 모용희는 장병들에게 “먼저 성에 오르지 마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서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명령 때문에 성이 위기에 몰리는 순간마다 결정타를 먹이는 데 차질을 빚었고,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같은 해, 백제가 왜군과 함께 옛 대방 지역의 석성(石城)을 공격해 오자, 광개토왕은 몸소 병사를 이끌고 맞아 싸웠다.
_pp.125~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