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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조실록 1 (살림지식총서 516)
이희진 지음 | 2017년 8월 25일
브랜드 : 살림지식총서
쪽수 : 184 쪽
가격 : 4,800
책크기 : 120*190
ISBN : 978-89-522-3709-5-0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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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 516.hwp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통일신라의 꽃을 피워낸
신라 1000년의 역사가 펼쳐진다!
왕대별 테마! 시대별 핵심!
굵직한 사건을 정사 중심으로 서술한 한국사의 맥!


문고본 최초로 시도되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 그 일곱 번째!
『신라왕조실록』1․2․3권 출간!

살림출판사에서는 지난 14년간 문・사・철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과, 과학기술・예술・실용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살림지식총서≫를 500종 이상 출간했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문고’임을 자처하는 ≪살림지식총서≫가 이번에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전 19권)’를 준비했다. 문고본으로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기획이다.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는 고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까지 반만 년을 지속한 한국사의 맥을 왕대별로 묶었다. 여기에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서고 고조선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는 요하문명도 포함시켰다. 이는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중국에 대항할 역사관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전 6권)을 2015년에 첫 번째로 선보였고, 2016년에는 고대사 편인 『고구려왕조실록』(전 2권) 『백제왕조실록』(전 2권) 『고조선왕조실록』 『가야왕조실록』 『발해왕조실록』 등이 출간되었다. 이어서 2017년에 이 책 『신라왕조실록』(전 3권)을 일곱 번째로 펴낸다.

박․석․김 세 왕족 혈통이 면면히 빚어온 신라 1000년을 펼치다!
신라는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1000년의 왕조다. 그러다 보니 다른 왕조에 비해 감안해야 할 변수도 많다. 우선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신라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며 황당한 근거를 드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왕족을 비롯한 신라 요인들의 계보와 활동 연대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이유를 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 사회는 이른바 ‘골품(骨品)’에 따라 신분을 정했고, 높은 신분을 유지하려면 불가피하게 극단적인 근친혼을 해야 했다. 이러한 극단적 계보 혼란은 활동 연대 착오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신라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저자는 피력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부정할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초기 기록은 일단 반영하여 서술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왜곡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정세 변화에 따른 고구려․백제․가야․왜와의 유기적 관계망을 중심으로 신라 1000년 사직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았다.

끊임없는 왜의 침입에도 굴하지 않은 신라의 방어력과 외교술!
한국 고대사의 관심사 중 하나로 현재 일본열도 세력의 조상인 왜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왜는 백제보다 신라와 가야가 먼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야는 결국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왜와 관계가 밀접했던 신라 초기 역사가 이른바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라와 관계된 왜의 역사를 해석할 때는 다른 나라보다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고구려・백제・가야 경우도 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경우 이들 나라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많다. 『일본서기』에서는 연표조작까지 해가며 진구황후[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어떻게 복속시켰는지 제법 구체적으로 허황한 내용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심지어 왜가 백제․고구려까지 복속시켜 이른바 삼국에 내관가를 따로 두었다고까지 기록해놓았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가 왜의 끊임없는 노략질과 침략에 얼마나 당차게 맞서고,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어떻게 맞대응해 나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저자는 신라․고구려․백제․가야 등이 왜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한 사료를 조명해 그 모순점을 바탕으로 사실 관계를 규명하여, 『일본서기』가 얼마나 우리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밝혀준다.


혁거세거서간의 신라 건국에서 문무왕의 삼국통일 완결까지!
저자는 『일본서기』의 왜곡 부분을 대조해 사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함께, 신라 역사를 왕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서술해 나라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썼다. 『신라왕조실록 1』에서는 신라건국 기원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514년(지증마립간 15)까지로 이웃 나라와 크고 작은 전쟁이나 외교적 마찰이 있긴 하지만,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려는 통치자의 노력들이 보인다. 그리고 『신라왕조실록 2』는 본격적으로 삼국통일 전쟁이 발발한 때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부분으로 당시의 전투 상황을 실감 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펼쳐놓았다. 또한, 그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장수들의 활약상을 『삼국사기』 「열전」에서 발췌한 무용담과 함께 실어 그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룬 후, 당나라와 이권다툼으로 옥신각신하던 중에 당나라 행군총관 설인귀와 문무왕이 주고받은 서신은 나당전쟁 와중의 꽃이라 불릴 만큼 명문장 중의 명문장이다.

경순왕 신라 1000년의 사직을 놓치다!
『신라왕조실록 3』에서는 삼국통일 이후부터 멸망까지 다룬다. 삼국통일 직후 왕들은 통일신라로서의 체제를 재정비하며 나라가 평화롭게 잘 운영되도록 힘썼다. 그렇지만 765년 이후, 혜공왕 대에 이르러 거듭된 반란으로 결국 왕과 왕비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 왕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불안한 정국이 150년간 계속 이어지고, 비정상적 왕위 찬탈 등 끊임없는 혼란이 빚어진다. 후백제․후고구려가 부흥한 900년대에 들어서는 신라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고, 그에 따라 세력도 약화되었다. 결국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삼국을 통합한 고려 태조 왕건에게 신라 1000년의 사직을 내놓았다. 신라는 이로써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라왕조실록 3』 부록 신라연표
기원전 57년(혁거세거서간 1) 신라 건국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고려에 넘어갈 때까지 총 56대 왕에 걸친 신라 1000년의 연표가 한눈에 펼쳐진다.
들어가며

제1대 혁거세거서간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 유리이사금
제4대 탈해이사금
제5대 파사이사금
제6대 지마이사금
제7대 일성이사금
제8대 아달라이사금
제9대 벌휴이사금
제10대 내해이사금
제11대 조분이사금
제12대 첨해이사금
제13대 미추이사금
제14대 유례이사금
제15대 기림이사금
제16대 흘해이사금
제17대 내물이사금
제18대 실성이사금
제19대 눌지마립간
제20대 자비마립간
제21대 소지마립간
제22대 지증마립간
어느 날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다. 소벌공이 그곳에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만 남아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어린아이가 나왔고, 소벌공은 그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다. 혁거세의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했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다고 존경해오다가, 이때 그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진한 사람들[진인辰人]은 박[호瓠]을 박(朴)이라 불렀는데, 혁거세가 깨고 나온 큰 알이 마치 박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그의 성(姓)을 박(朴)으로 삼았다. (……) 혁거세가 즉위한 후 『삼국사기』에 맨 처음 나오는 기록이, 기원전 54년(혁거세 4) 4월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기원전 53년(혁거세 5) 정월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이에 이어 알영의 탄생 설화가 나온다.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이를 보고 이상히 여긴 어떤 할멈[노구老嫗]이 거두어 키웠다. 이때 주워다 키운 여자아이의 이름은 우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났고, 혁거세가 이를 듣고서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행실이 어질고 보필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두 성인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_10~11쪽

미해를 잡지 못한 왜왕은 제상을 가두어두고 미해를 탈출시킨 이유를 물었다. 제상은 “계림의 신하인 나는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주려 했을 뿐”이라 답했고, 이를 들은 왜왕은 노했다. 그러면서 “나의 신하가 되어서 감히 계림의 신하라고 하니, 다섯 가지 형벌[오형五刑: 피부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넣는 벌, 코를 베는 벌, 발뒤꿈치를 베는 벌, 불알을 없애는 벌, 목을 베어 죽이는 벌]을 모두 줄 것”이라고 위협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기회를 주었다.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을 한다면 후한 녹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며 거절했고, 화가 난 왜왕은 제상의 발바닥 거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했다. 그래서 재상의 피 때문에 지금도 갈대에서 붉은 빛깔이 난다고 해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누구의 신하인지를 물었다. 그래도 “계림의 신하”라는 답이 나오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놓고 또 물었지만, 같은 답이 나오자 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왜왕은 곧바로 목도라는 섬에서 제상을 불 태워 죽였다. _146쪽

신라 왕으로서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次次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었다” (……)
503년(지증 4) 10월에는 나라 이름에 대한 신하들의 건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래 나라 이름[국호國號]이 확정되지 않아 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 등이 뒤섞여서 쓰인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의 신(新)과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의 라(羅)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는 취지였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예부터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독자적인 칭호를 써왔지만, 이제는 신라국왕(新羅國王)을 쓰자”는 건의도 올렸다. 지증은 이 건의 를 받아들였다. 지증의 즉위년에 통치자의 칭호에 관한 사론 을 굳이 붙여놓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_180~181쪽

512년(지증 13) 6월,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켜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도록 했다. 당시부터 울릉도(鬱陵島)라고도 불렸던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 쪽 바다에 있는 섬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방 100리의 면적을 가진 이 섬사람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신라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를 굴복시킨 인물이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로 부임했던 이찬 이사부 (異斯夫)였다. 그는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려우나 꾀로는 복속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사부는 “너희가 만 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허풍을 쳤다. 여기 넘어간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항복했다 한다. _183쪽